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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하이 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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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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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음악애호가가 테너가수에게 묻는다. “제일 멋진 오페라가 뭐예요?” “그야 라보엠이죠.” “왜요?” “거긴 ‘하이 씨’가 나오니까요.”

아직도 무모한 희망과 꿈을 꾸는 인간이 있어 다행이다
그것을 보여주려 오페라가 있고 테너가 있는 것이리라

‘씨’는 음 이름이다. 흔히 ‘도’라고 한다. ‘하이 씨’니까 ‘높은 도’란 말이다. 애국가의 가장 높은 음이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첫 음 “하”인데 여기서 여섯 음 더 올라가서 나오는 음이다. 보통 사람은 비명을 질러도 내기 어려운 음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페라 라보엠이 멋진 이유가 ‘하이 씨’ 때문이라는 것은 테너들이나 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들은 말한다. “테너들은 단순해요. 머리가 비었거든요. 그래야 공명이 잘되니까요.” 물론 이것도 우스갯말이다. 그러나 엄지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성대의 소리를 크게 키워 1000석이 넘는 극장 공간에, 그것도 요란하게 울려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뚫고 전달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문제다.

바로크 시대에는 카스트라토라는 전문가수가 있었다. 목소리 좋은 사내아이의 남성성을 제거한다. 이 아이는 몸이 자라나도 변성기를 거치지 않아 높은 목소리를 그대로 낼 수 있게 된다. 남자의 중음부터 시작해 여성의 고음까지 넓은 음역을 노래할 수 있는 데다 힘과 폐활량이 좋다. 또 특별훈련으로 고난도의 기교까지 겸비해 유명한 카스트라토는 요즈음 아이돌 가수 같은 명성을 누렸다.

시대가 지나 자연스러운 것을 선호한 19세기부터 이 별난 소리에 대한 애호는 사라졌고 대신 가볍고 기교적인 벨칸토 창법이 유행했다. 이 세기의 중반, 오페라가 극적인 내용과 격렬한 감정을 다루게 되자 테너의 높은 음역을 강렬하게 부르는 창법이 개발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후련하게 혹은 전율하게 만드는 이 소리는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작곡가들은 이 최고 음역이 멋지게 나오는 아리아를 만듦으로써 이 열광에 부응했다. 고음이 나오기 전에 적당히 힘을 고를 쉼표도 마련해 주고 주변의 선율도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었다. 심지어 가사까지 고려했다. 가장 핵심이 되는 가사가 이 정점에서 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오늘의 테너가 그 고음을 어떻게 부르는가”가 오페라 관람의 포인트가 되었다. 이후 오페라의 고음들이 테너들의 도전 목표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듣기에는 좋아도 이 정점의 음역은 자칫하면 실수로 연결된다. 높이뛰기 육상선수처럼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고 부를 때 특별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테너들은 일단 이 정점에 도달하면 자신을 과시하듯 임의로 길게 뽑는다. ‘투란도트’의 테너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의 최고음은 ‘하이 씨’보다 반음 낮은 ‘비’인데 원래 16분 음표밖에 안 되는 것을 테너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늘여 몇 초간이나 뽑곤 한다. 다른 부분에선 엄격한 지휘자들도 이런 때는 기다려 준다.

훈련한다고 해서 모든 테너가 다 원하는 소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 뽑히고 뽑힌 사람들이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다. 일단 오페라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사람들은 ‘매우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겨도 좋다. 이들 중에 비중 있는 역을 계속해서 맡게 되는 사람은 또 선별된 사람들이다. 테너로서, 성악가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모험이요 도박에 가깝다. 성공하면 화려하지만 그 확률이 퍽 낮은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안정적 직업으로 몰려가는 시대에 이렇듯 미래가 불투명한 일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다. 소수의 성공한 성악가들 외에 그들은 실은 ‘라보엠’의 예술가들처럼 살아간다. 가난하게. 꿈을 가지고.

‘라보엠’, 1막에서 가난한 시인 로돌포는 수를 놓아 살아가는 여인 미미의 손을 잡고 노래한다. “그대의 찬 손 내가 녹여 주리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대신 희망이 생겼으니까요” 하고 부르는데 이때 “희망”에서 ‘하이 씨’를 부른다. 슬픈 노래도 아닌데 눈물이 난다. “그렇다. 인간은 꿈을 꾸는 존재다. 아직도 꿈을 꾸는 인간이 있다니 다행이다. 저 대책 없는 꿈, 무모한 희망, 그 꿈과 희망이 보여 주는 짧지만 강렬한 아름다움, 그걸 보여 주려고 오페라가 있고 테너가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는 아리아를 마친 테너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