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53)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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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1 면

대원군이 거주하던 운현궁의 노안당(사진 위)과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대원군을 뜻하는 ‘석파선생’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사진가 권태균

?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의 철종이 사망했다. 5남6녀를 두었으나 금릉위 박영효에게 시집간 4녀 영혜(永惠)옹주를 제외하고는 어려서 모두 죽어 후사가 없었다. ? 두 외척가문의 대립이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에게 기회를 주었다. 조만영(趙萬永)의 딸이자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풍양 조씨, 순조비 순원왕후와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의 안동 김씨가 그들이었다. 한때 풍양 조씨가 조만영을 필두로 안동 김씨에 맞서기도 했으나 헌종 12년(1846) 조만영의 사망을 계기로 그 세가 약화되고 장김(壯金)이라 불렸던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 대왕대비 조씨는 철종 사망 당일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을 원상(院相)으로 임명하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으로 익종대왕의 대통(大統)을 잇게 하기로 작정했다(『고종실록』 즉위년 12월 8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조씨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종을 철종이 아닌 자신의 남편 익종의 후사로 결정한 것이었다. 명복이 만 열한 살의 미성년이었으므로 철종 사망 당일 대왕대비 조씨의 수렴청정 절목(節目: 법령)이 반포되었다. 그러나 대비 조씨는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고 국사가 다난(多難)하니 대원군이 대정(大政)을 협찬하고…백관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지휘를 청(聽)하라(현채, 『동국사략』)”고 대원군에게 대권을 넘겼다. 이렇게 대원군의 시대가 극적으로 열렸다. ? 흥선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恩信君) 이진의 후사였다. 은신군은 열여섯 때 죽어 후사가 없자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李秉源)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그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이구(李球)였다.


? 대원군은 극적으로 집권한 후 벼르고 벼르던 칼을 뽑았다. 대원군 개혁정치의 큰 목표는 노론 벌열가문의 약화와 왕권 강화였다. 대원군은 고종 1년(1864) 6월 함경감사 이유원(李裕元)을 좌의정, 홍문관 제학 임백경(任百經)을 우의정에 임명해 충격을 주었다. 이유원은 소론이었고 임백경은 북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백경은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이 몰락한 지 240여 년 만에 등장한 북인 정승이었으나 그해 죽고 말았다. 대원군은 고종 3년(1866)에는 남인 유후조(柳厚祚)를 우의정에 임명해 다른 당파를 중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 고종 2년(1865)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만동묘는 송시열(宋時烈)의 뜻에 따라 그 제자들이 충청도 괴산군 화양리에 세운 명나라 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서 황제를 빙자해 제후(조선 임금)를 압박하는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총본산이었다. 대원군은 고종 8년(1871)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면서 47개 소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 대원군은 또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본산인 비변사(備邊司) 개혁에 나섰다. 대원군은 고종 1년(1864) 2월 비변사와 의정부를 나누는 분장절목(分掌節目)을 반포해 의정부를 비변사에서 독립시켰다. 비변사는 의정부 조회 때 대신들이 임시 거처하는 대기실로 격하되고 비변사에 내렸던 ‘묘당(廟堂)’이란 현판은 의정부 대청으로 옮겨 달게 했으며 비변사의 인장(印章)은 영원히 녹여 없앴다. 대원군은 왕권을 억압하던 노론 벌열과 그들이 장악한 국가기구들을 개혁하는 것으로 왕권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이른바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는 인조반정 이후 그 어느 임금의 명령보다 권위가 있었다.

정족산성 동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가 이끄는 결사대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곳이다. 사진가 권태균

?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수탈 대상이었던 민중들이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임을 차차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원군이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그의 성패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대원군의 극적인 등장은 대왕대비 조씨와 대원군 사이의 정치적 밀약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인 철종 13년(1862) 2월 4일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농민들이 관아를 공격해 현감이 도주했고, 열흘 뒤에는 경상도 진주에서 농민들이 관아와 양반 사대부가를 공격했다. ? 농민항쟁의 불길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일대로 삽시간에 퍼져나가 삼남농민항쟁(임술농민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제주도와 함경도까지 확산된 전국적 규모의 농민봉기는 개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이것이 안동 김씨조차 대원군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했던 한 요인이었다. ? 농민들을 봉기하게 한 직접적 이유는 삼정(三政) 문란이었다. 삼정은 농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田政), 병무행정인 군정(軍政), 빈민 구제행정인 환정(還政)을 뜻하는데 각종 탈법과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 대원군은 전국적인 농지조사사업[査結]을 벌여 막대한 은결에 세금을 부과했다. 비록 문제의 본질인 지주-전호(佃戶:소작)제의 문제점에까지 손을 대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도 노론 일당독재 체제에서는 보기 힘든 개혁이었다. ? 환곡(還穀)은 곡식이 부족한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관곡(官穀)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기에 1할의 이자를 덧붙여 받던 빈민 구제책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환곡은 백성들의 등골을 빼는 강제 고리대로 전락했다. 고종 4년(1867)에는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었다. 환곡제가 관 주도라면 사창제는 민(民) 주도라는 점이 달랐다.? ? 군정(軍政)의 폐단도 환곡 못지않았다. 대원군은 수백 년 지속된 이 폐단에 과감하게 칼을 대 고종 8년(1871) 양반·상민의 구별 없이 모든 집이 군포를 내게 하는 호포법(戶布法)을 강행했다.


? 대원군 집권 기간에는 철종 말엽의 삼남 농민항쟁 같은 대규모 민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기에 발생했던 민란들은 그 성격이 과거와는 달랐다. 조선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삼았다.? 사실 삼정의 문란은 백성들을 들고 일어서게 하는 표면적 동기에 불과했다. 그 내면에는 새로운 체제를 갈구하는 흐름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 대원군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왕권 강화라는 봉건적 틀 속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경복궁 중건사업이 대표적인 시대착오적 정책이었다.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세력이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는 판국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대역사를 국가와 백성을 부자관계로 설정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합리화했다. 공사자금이 부족하자 대원군은 ‘자진해서 납부한다’는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했는데, 원납전은 결국 관직매매전으로 변질되었다. 그래도 자금이 부족하자 기존의 전세(田稅)에 1결당 전 100문(文)을 더 받는 결두전(結頭錢)을 신설했다. 고종 3년(1866) 당백전(當百錢)을 유통시키더니 이듬해에는 가경통보(嘉慶通寶) 같은 값싼 청나라 동전[淸錢]을 대량 수입해 유통시켰다.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20분의 1에 자니지 않는 당백전이나 2분의 1 내지 3분의 1에 불과한 청전(淸錢)은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무력화시키면서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경제가 무너지자 백성들은 대원군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내정의 실책보다 더 큰 문제는 시대착오적인 대외정책이었다.

척화비경북 구미에 있는 것으로,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이채롭다.

? 철종 11년(1860)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불 연합군은 북경의 원명원(圓明園)을 점령했고 러시아는 청나라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어 우수리강 동쪽 영토를 차지했다. 조선은 뜻하지 않게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야 했다. 대원군도 서양인과 내통한 조선인의 목을 베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천주교는 대원군의 집 안채까지 전교하는 데 성공했다. 천주교 지도자 홍봉주(洪鳳周)는 대원군에게 접근했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 번 더 올리라”고 권유해 전 승지 남종삼(南鍾三)이 다시 대원군을 만났다. 5~6명의 대신과 함께 남종삼을 만난 대원군은 “프랑스 주교가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남종삼이 “가능하다”고 답하자 주교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고 대원군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 이유에 대해 ‘주교가 지방에서 늦게 상경하자 대원군이 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대왕대비 조씨의 반대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신앙의 자유를 바라는 천주교도들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고종 3년(1866:병인년)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조선 입국 21년째인 다블뤼 주교가 유창한 조선어로 천주교 교리를 변호한 뒤 사형당한 것을 비롯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80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 신자들이 사형당했다. 이때 조선인 천주교도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건진 리델 신부가 청나라 산동반도의 지부로 탈출해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프랑스 신부 처형 사실을 전하면서 병인양요의 서막이 올랐다. ? 프랑스는 직접 조선 원정을 감행했다. 7척의 함선에 1500여 명 규모의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 갑곶이(甲串鎭)와 김포의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학살 책임자 처벌과 조선·프랑스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의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결사대가 그믐밤에 강화도 정족산성을 장악하자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퇴각했다. 같은 해(1866) 8월 평양 대동강에서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火攻)으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하고 선원 24명을 몰살시켰다. 고종 8년(1871:신미년) 미국의 로저스 제독은 5척의 함선에 1200여 명의 군사로 조선을 공격했다. 이 신미양요도 미국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강화도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은 데 비해 조선군은 350여 명이 전사했다는 사료도 있을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 내용은 조선의 패전이지만 형식은 승전이었다. 이때 대원군이 형식상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국을 단행했다면 조선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는 최초의 동양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상 승전에 고무된 대원군은 그해 8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主和賣國]”이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대원군은 군사력으로 쇄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었고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환곡제를 부활시켜 자신의 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은 데다 경복궁 중건, 환곡제 부활 등으로 상민들의 지지까지 상실했다. 고종 10년(1873) 10월 25일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 공격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 대해 고종이 뜻밖에도 “매우 가상하다”면서 호조참판을 제수했다. 쇄국론자 대원군이 쇄국론자 최익현의 상소로 무너진 것은 대원군 정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종은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부친을 버리는 것으로 즉위 10년 만에 정치 전면에 비로소 등장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5호 2010년 9월 25일, 제186호 2010년 10월 2일, 제187호 2010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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