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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AIIB 망신’ 부른 깜깜이 인사 언제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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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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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숙
경제부문 기자

올해 1월 17일 기획재정부는 기자단에 엠바고(일시적 보도 유예)를 요청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서 부총재 5명을 공식 발표하기 전까지 한국인 후보자에 대한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요구였다. 기재부는 출입기자에게 “AIIB측은 부총재 최종 선출 때까지 후보 실명 보도 등에 대해 엄격한 대외 비공개를 유지할 것을 요청했다”는 문자 공지도 했다.

당시 AIIB 한국인 부총재 단일 후보자로 정부가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을 낙점했다는 건 정설이었다. 정부에서 한국 몫으로 투자운영관리 담당 부총재(CIO)를 요구했는데 AIIB에서 거부했다는 설이 흘러나올 만큼 얘기가 무르익었던 때다.

뜬금없는 엠바고 요청에 기자들 질문이 잇따랐다. 기재부 비공식 해명은 이랬다. “홍 회장이 부총재 후보로 정해졌다는 기사가 나오면 AIIB에서 선임을 취소할 우려가 있다. 국익을 위해 보도를 자제해달라.”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었지만 기자들은 엠바고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국인 부총재가 나오지 못할 0.0001%의 가능성을 걱정해서다. 홍기택 투자위험 관리 담당(CRO) 부총재 임명을 AIIB가 공식 발표한 2월 3일 전까지 관련 기사가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은 배경이다. 홍 부총재는 언론 검증도 없이 AIIB 부총재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후보자 이름이 언론에 거론되면 부총재직이 날아갈 수 있다는 기재부 설명은 사실이 아니었다. AIIB 공식 발표가 있기 전인 1월 2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를 비롯한 영국 언론은 대니 알렉산더 전 재무차관이 영국 몫 AIIB 부총재로 선임될 것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알렉산더 전 차관은 무사히 수석부총재로 임명됐고 지금도 AIIB에서 활약 중이다. 한국 기자들이 불합리한 엠바고까지 지켜가며 보호한 홍 부총재는 어떤가. 결국 AIIB 부총재 자리를 날려버렸다. 홍 부총재는 국민 세금으로 메운 4조원 넘는 AIIB 분담금을 무색하게 하며 국제 망신을 자초했다.

홍 부총재는 산은 회장 임명 때부터 자질 논란에 휩싸였다. 정부가 AIIB의 엠바고를 이유로 들어 홍 부총재를 둘러싼 국내 언론의 평가와 검증을 피해가려 했다는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오히려 그때 철저한 검증을 거쳤다면. 다른 능력 있는 후보로 교체를 했다면. 역사에 ‘만약에’란 가정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아쉬움은 크게 남는다. 그런데도 정부는 홍 부총재 후보 선임부터 휴직, 후임자 선정까지 ‘깜깜이 인사’를 현재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조현숙 경제부문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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