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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나이 토마스 성당엔 ‘동쪽으로 간 도마’ 전설이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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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15면

도마복음의 저자인 예수 제자 도마가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인도 첸나이의 성 토마스성당. [사진 주강현]

성당 지하 박물관에 전시된 도마의 순교 장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자바 등지에 가면 힌두사원과 인도인 빌리지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베트남 다낭의 참파 문명, 중국 광저우(廣州) 사원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에서 인도 문명의 흔적은 드넓게 퍼져 있다. 동아시아로 건너간 인도인들 중에는 남인도 동부 코로만델 해안 혹은 타밀나두 출신이 많다. 720㎞에 달하는 코로만델 해안은 1년 내내 파고가 높고 10~4월에는 북동 계절풍도 심하게 부는 악천후 지역이다. 그러나 일단 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곧바로 벵골만을 가로질러 말레이반도·인도네시아·인도차이나 등지에 쉽게 당도할 수 있다.


인도라고 다 같은 인도는 아니다. 영토가 방대하고 인종·문화·언어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두루뭉술 ‘인도인’이라고 총칭하면 그 다양성을 간과할 수 있다. 특히 남인도 동부 해안은 타 지역과 확실히 다른 특징이 있다. 타밀나두의 열린 창구인 첸나이 공항에 내리니 뭄바이나 콜카타에서와는 달리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검은 인도인이 눈에 많이 띄었다. 통념상 광고 등에 자주 등장하는 인도인 형질과는 달라 보였다. 본토 원주민 드라비다인의 강력한 핏줄이 이어지는 타밀나두의 땅답다. 동남아 인도인이 뉴델리 등의 아리안 백인 계열과는 달리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인도 남부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암시한다.

1 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아르주나 고행상. 첸나이 남부 마하발리푸람에 있다. 2 프랑스 식민 도시였던 폰티체리의 프랑스 성당. 영국의 식민국가였던 인도에는 프랑스풍 성당과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원주민 드라비다 특색 강한 타밀나두 북방의 유목민 아리안족이 밀어닥치자 원주민 드라비다인은 남쪽으로 밀려났다. 드라비다인은 역사적으로 ‘반(反)힌디(힌디어)적’이었다. 남동해안 지역에서 타밀호랑이 등 분리주의 운동은 사그라들고 있지만 힌두어 대신에 타밀어를 쓰는 등 타밀의 자부심은 여전하다. 이미 2세기에 독자적인 타밀어(Brahmi)가 쓰이고 있었으니 사실상 힌두어와 무관한 언어 권역이다.


첸나이와 마드라스를 별개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늘날의 첸나이가 바로 마드라스다. 탐사대는 첸나이 구도심에서 멀지 않은 마리나 해변을 먼저 찾았다. 해변에는 어시장이 간이노점으로 줄지어 있다. 갈치·병어·고등어·삼치 등 낯익은 어종이 눈에 띈다.


마리나 해변 끝에 성 토마스 성당이 서 있다. 예수 제자 도마가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다는(52~70년) 전설이 깃든 성당이다. ‘달마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갔다면, 도마는 동쪽 인도로 갔다. 도마는 해안의 작은 산에 숨어 살았으며 동굴 안에는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바닥 자국도 있단다. 성당의 지하에는 도마를 기리는 박물관이 세워졌다. 이 박물관은 그가 인도에 와 순교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의 족적들을 담고 있다. 해변에는 2004년의 초대형 쓰나미 때 이곳 해안만큼은 피해를 보지 않은 것이 그의 영력 덕분이라는 뜻으로 세운 토마스 막대가 신성하게 서 있다.


도마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어떻게 파르티아 제국을 거쳤을까 하는 의문을 표시하는 이도 많다. 그가 살던 시절, 파르티아 제국은 북인도까지 포괄했으며 중국과 소통하고 있어 로마·중국 간 교류가 가능했다. 도마는 파르티아 제국의 국제적 교역망을 통해 오늘의 첸나이로 들어왔을 것이다.


고대사적으로 첸나이 일대는 밀라포르(Mylapore)라 불리던 오랜 항구. 고대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2세기)가 이 항구를 언급했으며 인도양을 가로질러 무역에 종사하던 아랍인은 ‘로마인 타운’이란 뜻으로 베투마(Betumah)라 불렀다. 1293년 마르코 폴로도 도마 성지를 방문해 경배드렸다.


도마복음은 1945년 이집트 북부 나그함마디에서 어느 농부에 의해 발굴됐다. 이를 기초로 오강남 비교종교학자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인된 마태·마가·누가 공관복음(共觀福音)과 달리 도마복음은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 외경으로 밀려났다. 오 교수는 도마복음은 내 속에 빛으로 있는 깨달음을 강조한다고 풀이했다. 먼 남인도 밀라포르 항구에 서려 있는 도마 스토리는 실제 역사적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 이미 로마와 연결돼 있던 당대 항로를 손쉽게 이용했을 것이다.


코로만델 해안과 관련된 고대 동서 교류를 밝혀줄 결정적 증거는 의외로 많다. 첸나이에서 해변을 따라 90여 분 달리면 마하발리푸람에 당도한다. 팔라바 왕조의 두 번째 수도였던 이곳도 한때 인도의 중요 무역항이었다. 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아르주나 고행상을 비롯한 뛰어난 동굴사원은 훗날 타밀 건축과 예술의 전범이 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는 해안 사원이 눈에 띈다. 하필이면 왜 해안에 거대 사원을 세웠을까. 바다 정복의 야망을 품었던 팔라바 왕조의 염원, 뱃사람의 안전과 풍요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오늘날 동남아에 뿌리내린 인도 문명의 흔적은 이 같은 대항해의 결과물이리라.


프랑스 식민 도시 폰티체리는 국제 항구도시 탐사대는 마하발리푸람에서 90여 분을 더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던 인도 도시와는 다른 이국적 도시 폰티체리가 나타났다. 두말할 것 없이 프랑스 식민의 도시였다. 일반적으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포르투갈이 처음 당도하고 네덜란드가 뒤따라왔다. 영국은 1640년에야 첸나이에 조지타운과 조지성을 축성한다. 1746년 프랑스는 첸나이를 공격해 접수하고 1749년까지 잠시 지배한다. 이후 인도 땅에 거류민단 체류형의 프렌치 식민 도시가 건설된다.


폰티체리는 프랑스가 정착하기 훨씬 이전에 완연한 무역도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폰티체리는 코로만델 해안의 ‘아시아의 열린 도시’였다. 중국·말레이반도·페르시아·아프리카·몰루카 도서들과 무역거래를 했다. 농산물·철 등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비단과 금·은을, 아라비아에서는 말, 몰루카제도에서는 향료를 들여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첸나이뿐 아니라 폰티체리도 ‘포도케(Podoke)’로 언급했다. 강 언덕에서 로마시대의 주거지도 발견됐다. 폰티체리 박물관을 찾아가니 로마시대 동전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다. 폰티체리가 오래된 국제적 항구도시였음을 입증한다.


해변으로 나가니 프랑스 영사관 건물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시골도시에 프랑스 영사관이라. 국제적 영향력과 관심의 장기 지속을 얘기해준다. 실제로 프랑스 관광객도 많았다. 성당과 프랑스풍 건축물이 벵골만의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바실리카성당, 동정녀 마리아성당, 세이크리드 하트교회, 성모 마리아성당 등이 있는 만큼 이 일대는 기독교인 비율이 만만치 않다. 1926년 스리 오로빈도와 ‘더 마더’라 불리던 한 프랑스 여인이 설립한 아슈람은 요가와 현대과학을 결합한 영적 교의를 설파하고 있다. 폰티체리 인근의 오로빌에 가도 ‘더 마더’의 포스터가 펄럭인다. 오로빌은 124개국에서 받은 기부금으로 만들어진 국제 영적 도시다. 바닷가에 밀집된 아슈람은 바다를 통한 제국의 침략과 지배 그리고 인도의 영적 자산과 요가가 오랜 전통으로 버무려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 콘텐트가 스토리텔링화돼 국제적 문화상품으로 정착한 사례다.


인도 대륙의 땅끝 마을 카냐쿠마리 해양 실크로드의 제국 팽창사에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제외하고 주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일정 몫을 차지하고 있다. 1674년 폰티체리, 1688년 콜카타 북방 35㎞ 지점의 찬데르나고르(Chander Nagor), 1721년 남인도 서쪽 케랄라 지방의 소읍인 마에(Mahe), 1731년 같은 폰티체리 지방의 야남(Yanam), 그리고 1738년 폰티체리 남쪽의 카라이칼(Karaikal)이 영구 조차지로 됐다. 한결같이 바다를 통한 선단의 이동으로 프랑스 본국과 연결됐으며 인도차이나 식민지 과정에서 이들이 노하우를 전수하는 일정한 ‘선배’ 역할도 수행했다.


이들 프랑스 정착 도시는 ‘인데스 오리엔탈 캠페인’의 슬로건하에 본격적으로 조성됐으며 프랑스-영국의 국제적 영향 관계에 의해 용인됐다. 싱가포르 같은 영국과 중국의 도시에도 프랑스 거류 사회가 존재했다. 프랑스식 건축과 예술, 도자기와 음식, 매너와 풍습 등이 드라비다의 노예노동에 기대 남인도 바닷가에 수세기 동안 구축된 것이다.


탐사대의 타밀나두 종착역은 인도 대륙의 마지막 꼭짓점인, 우리로 치면 해남의 땅끝 마을인 카냐쿠마리(코모린 곶)다. 고생고생 해서 하루 종일 달려온 것에 비하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나 할까. 그래도 땅끝을 밟는다는 일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일인지라 꼭짓점을 보자마자 피로가 풀렸다. 아라비아해와 벵골만, 인도양이 삼각 지점으로 만나는 곶 중의 곶. 히말라야산맥으로부터 이 조그마한 꼭짓점까지 인도의 저력이 한데 모이는 마지막 지점이다. 동남아와 중국으로 가는 대부분의 제국의 선단들이 이 앞바다를 지나쳤을 것이고 정화를 필두로 중국의 선단 역시 이곳을 지나갔다.


명상의 거장을 위한 기념관과 동상, 중요 장소에는 예외 없이 어디에나 있는 간디 기념관, 시바 여신에 바치는 남근이 바닷속에 세워져 있다. 인도의 최남단은 ‘남근’이 지킨다? 그렇게 말해도 좋을 법하지 않을까. 힌두를 반대하는 타밀이지만 여전히 시바의 힘이 인도 대륙의 말단을 떠받치는 중이다.


다음에는 콜람·웰랍파·코친 등 남인도?아라비아해 항구편이 소개됩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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