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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듯한 점프, 연습 또 연습 덕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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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14면

볼쇼이발레단과 함께 러시아 발레를 대표하는 마린스키발레단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브누아 드 라 당스 (Benois de la Danse)’?수상 소식을 전하는 기사와 수석 무용수 김기민(24)의 사진이 뜬다. 이 상은 1991년 국제무용협회 러시아본부가 발레의 개혁자?장 조르주 노베르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강수진(1999년)과 김주원(2006년)이 수상했으며 발레리노로는 김기민이 처음이다.


그는 국내외에서 신기록 제조기다. 2009년 12월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지그프리트 왕자 역을 맡아?국내 직업 발레단 역사상 최연소(17세) 주역을 기록했다. 또 마린스키발레단 230여 년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 남성 무용수일 뿐만 아니라?2012년 입단한 지 두 달 만에 ‘해적’과 ‘돈키호테’의 주역을 꿰찼다. 지난해 4월엔 수석 무용수로 등극했다.


9살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학원에서 형(김기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을 따라 발레를 시작한 김기민은?이제 파리오페라발레단, 아메리칸발레씨어터 등 세계적 발레단의 초청을 받고 전세계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백야 축제가 한창이던 지난달 초,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날아갔다.

김기민이 용맹한 전사 솔라르(Solar)역을 맡은 ‘라 바야데르’를 보기 위해 지난달 7일 마린스키 극장을 찾았다. 그의 파트너 이름이 눈에 번쩍 띄었다. 무희 니키아 역에 마린스키발레단의 간판스타 디아나 비쉬네바, 감자티 역에 빅토리아 테레슈키나였다. 특히 이날 공연은 올 연말 출시될 DVD 제작을 겸하고 있어서 구석구석에 카메라가 설치된 것이 특이했다.


김기민이 그랑줴떼(grand jete·공중에 뛰어올라 양다리를 일자로 펴는 테크닉)나 카브리올(cabriole·공중에 뛰어올라 두 발을 맞부딪치는 테크닉) 등 환상적인 점프 동작을 할 때마다 환호와 박수 갈채가 이어졌다. “시간을 멈춘 듯한 점프”라는 미디어의 찬사를 받는 김기민의 놀라운 도약을 보며 바슬라프 니진스키를 떠올렸다. 20세기 초 ‘발레의 신’으로 불린 니진스키는 ‘공중에 떠올라 머물러 있는 듯한 엄청난 도약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니진스키에게 따라다녔던 수식어가 이제 김기민 앞에 붙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공연 다음날 저녁, 김기민과 그의 스승 마그리타를 극장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마그리타 선생은 식사시간 내내 김기민을 사랑스런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대했다.


수상을 축하한다.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세계적인 발레단 스타들이 함께 후보로 올랐고 그 중 내가 제일 어렸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기뻤다(한 인터뷰에서 그는 수상 소식을 들은 직후 소감을 묻자 ‘연습하러 가야죠’라고 답했다. 김기민은 ‘라 바야데르’의 솔라르 역과 ‘세헤라자드’의 황금노예 역으로 노미네이트됐다). 나는 두 작품의 음악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역할에 몰두하기 쉬웠다. 동양적인 작품들이라 내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인복이 많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사랑과 격려로 도와준 많은 분들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7일 밤 공연은 DVD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2014년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잠시 방문한 형이 마린스키극장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며 내게 던진 첫 마디가 ‘기민아, 너 정말 춤출 맛 나겠다’였다. 형은 ‘우리가 수없이 본 DVD 마린스키발레단 공연의 주인공이 너라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다. 극장이 이렇게 멋지고 환상적인데 어떻게 춤을 못 출 수 있겠니’라며 나보다 더 흥분했다. 발레를 배울 때부터 형과 함께 세계 유수 발레단의 공연 DVD를 수없이 봤다. 마린스키 DVD를 보면 오프닝 음악과 함께 지휘자와 마린스키극장 객석이 나온다. 무대에 설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오른다. 이제 카메라가 아닌 내가 그 장면을 바라본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 State Academic Mariinsky Theatre

마린스키에서의 공연 모습 ⓒ Vadim Shults

발레단 DVD 제작 시 주인공은 어떻게 결정되나. “작품에 따라 가장 탁월한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무용수가 선정된다. 수석 무용수들은 개성을 존중해 준다. 파트너와의 호흡도 중요한 요소다. 그 동안 비쉬네바, 테레슈키나와 파트너로서 호흡을 많이 맞춰왔다. 발레단 DVD 제작은 나로서는 이번이 처음인데, 그들과 같이 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발레는 파트너가 매우 중요하다. “경험이 많고 훌륭한 무용수일수록 겸손하고 배울 점이 많다. 이들 말고도 알리나 소모바, 울리아나 로파트키나 같은 수석 무용수들과도 호흡을 맞춰왔는데, 무용수로서 뿐만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리허설 분위기가 너무 좋다.”


마린스키발레단에는 어떻게 입단하게 됐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이던 2011년 연수단원 과정으로 오디션을 보러왔다가 발레단 단장으로부터 ‘바로 전막 공연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연수 기간 중 ‘해적’의 알리 역으로 마린스키에 데뷔했다. 2012년 퍼스트 솔리스트(first solist)로 입단했고 2015년 수석 무용수(princeple)로 승급했다.”


데뷔 공연이 성공적이었다고 들었다. “연수 단원이 주역으로 데뷔한다는 것이 큰 이슈였다. 공연 당일 ‘해적’ 파드되의 코다 부분에서 관객들이 내 춤에 맞춰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보냈다. 나중에 들었는데, 발레단 단장님이 ‘마린스키 발레단 공연 20년 동안 처음 본 열광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많은 단원들이 무대 옆에서 지켜봤다. 항상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발레단 사상 처음으로 동양에서 온 무명 발레리노의 데뷔 공연을 보기 위해 모였다고들 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긴장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기존 단원의 시선이 차갑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너무나 따뜻하고 순수한 동료들이다.”


좋은 스승을 만난 것 같다.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영재원 시절부터 졸업 때까지 지도해주신 부부 지도자 블라디미르 킴과 마가리타 쿨릭 선생님과의 인연도 내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예원중 시절 영재 프로그램에서 처음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블라디미르 선생님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같은 클라스에 신체 조건이 탁월한 친구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오직 그 친구에게만 집중했다. 지금도 가끔 선생님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를 ‘턴만 잘 도는, 그러나 신체적인 조건도 뛰어나지 않은 너무나 못생긴 학생이었다’며 놀리기도 한다. 선생님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저녁 선생님을 찾아가 발레 비디오 를 보여 달라고 하고 동작 분석과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눈치없이 밤 11시에도 문을 두들겼다. 친구들이 놀 때 나는 선생님과 발레와 관련된 대화를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친형과 잘 생기고 신체적 조건이 좋았던 친구에 대한 콤플렉스가 오늘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콤플렉스는 어떻게 극복했나. “나는 ‘연습벌레’였다. 신체적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2, 3년간 연습을 계속하자 체형이 갖춰졌다. 키가 커졌고 팔 다리도 길어졌다. 파워도 생겼다. 그때부터 선생님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선생님과 지금도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웃는다. 두 분 선생님은 나에게 부모님과 같은 존재다.”


발레단 생활은 어떤가. “공연이 많다. 마린스키극장뿐만 아니라 국내외 투어가 많다. 전 세계를 다니며 공연한다. 201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초청 공연을 했는데, 그때 서희 누나와 공연을 같이 했다. 매일 매일 리허설과 공연으로 일정이 빡빡하다. 신작 공연을 제외하면 무대 리허설이나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없다. 매일 다른 작품을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프로들의 무대인 것 같다(필자는 ‘라 바야데르’를 본 다음날 ‘돈키호테’ 공연을 봤다. 매일 다른 작품을 위해 거대한 무대장치와 조명이 하루 만에 새롭게 세팅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군무(코르드 발레)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무 리허설을 할 때는 참관하러 들어간다. 많은 도움이 된다.”


발레단 작품 지도는. “마린스키발레단의 솔로 파트 무용수들은 개인 코치가 전담해 지도한다. 모든 코치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들이다. 대부분 바가노바 발레스쿨과 마린스키발레단 수석 무용수 출신이다. 모든 레퍼토리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가치관·미학·철학·예술관이 담긴 지도를 받는다.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유학 온 음악이나 문학 전공 한국 학생들이 나를 부러워한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선생님과 마그리타 선생님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부모님처럼 이끌어 주는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


상트 페테르부르그(러시아) 글 장선희 세종대 무용과 교수, 사진 박귀섭(BAKI) ·마린스키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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