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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다중대표소송제 묘수일까 악수일까] ‘악용 여지 vs 주주권 강화’ 찬반의견 팽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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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등 여야 의원 122명은 7월 4일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다중대표소송제의 도입’ 여부 등을 놓고 또 한번 찬반 논란이 뜨겁다.

더불어민주당이 당초 계획대로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난 20대 총선 때 공약했던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정부와 여당인 새누리당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김종인 더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7월 4일, 여야 의원 122명이 뜻을 모은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20대 국회 들어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발의된 법안 중 가장 많은 수의 의원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다. 더민주당에서 109명, 국민의당에서 10명, 정의당에서 2명이 서명했고 새누리당에선 김세연 의원이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여야 의원 122명, 상법 개정안 발의…해외에서 극히 제한적 시행

이번 상법 개정안에서 재계가 가장 반발하고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다중대표소송제의 도입’이다. 다중대표소송제란 특정 모회사가 자회사의 위법 행위로 손해를 볼 경우, 모회사 주주들이 자회사의 이사회 등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모회사가 발행한 주식 총수의 1% 이상을 보유한 주주라면 누구나 손해를 입힌 자회사 이사들에게 소송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

현행 주주대표소송에선 모회사 지분의 1% 이상을 가진 주주들이 해당 회사 경영진에 한해서만 소송할 수 있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모회사뿐 아니라 자회사에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만큼, 주주 지위가 강화된다. 통상 국내 재벌기업들은 오너가 적은 지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기형적인 구조 안에 있다. 주주들로선 재벌기업들에 경영상의 책임을 보다 쉽게 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계가 강력 반발하고 나선 이유다.

모회사 아닌 자회사 경영진에도 소송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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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대표소송제의 도입은 앞서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그러나 재계의 반발이 심했던데다, 정부도 경제민주화에서 ‘경제활성화’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면서 도입이 되지 않았다. 이후 야권이 다시 도입론을 내세웠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지부진하다가, 20대 총선 후 여소야대 정국이 열리면서 야권을 중심으로 재차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김종인 대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집단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경제민주화를 이룩해 포용적으로 성장, 새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고 발의의 배경을 설명했다.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은 묘수(妙手)일까, 아니면 악수(惡手)일까. 재계는 악수로 규정하면서 제도 도입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난색을 표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재계가 내세우는 반론의 주된 근거 중 하나는 외국계 자본의 제도 악용 가능성이다. 특히 한국 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외국계 펀드가 악의를 갖고 소송을 제기하거나, 이를 빌미로 경영권에 개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승소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소송 제기 자체가 경영권에 대한 위협 수단이 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2003년 SK그룹이 소버린, 2006년 삼성물산이 헤르메스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는 등, 그간 국내 기업들이 외국계 펀드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려 들인 돈만 수조원에 달한다”며 “더 많은 외국계 자본이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에 대한 개입을 목표로 (다중대표소송제를) 악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같은 적대적 M&A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투기 세력들로선 제도를 악용해 부당이득을 챙길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소송부터 제기해 기업의 주가 하락을 유도한 후 주식을 사들인 다음, 소송을 취소하는 식으로 단기 차익을 노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밖에 소송을 제기한 다음, 증거 조사나 장부 열람을 통해 경쟁사의 자회사가 가진 기술과 영업상의 기밀 등을 빼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우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전무는 “자회사 경영진이 소송 남발로 인한 위험성을 회피하는 과정에서 소극적 경영으로 기업들 발전이 저해되는 부작용도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권에 대한 보장 없이 기업들이 투명해지기만 바란다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지적들에 대한 반박의 목소리도 높다. 우선 외국계 자본이 제도 악용을 시도하더라도 이를 염려할 만큼 나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주장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외국계 자본의 이사회 장악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오히려 주주의 권리와 역할을 강화해 기업들에 대한 외부 자극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다중대표소송제가 경제민주화를 이룰 묘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주들이 강화된 지위로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하면서 기업들이 경영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이란 얘기다.

전영준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은 “지주사 밑에 자회사를 두고, 자회사를 통해 방만한 경영을 하는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를 개선하려면 주주들이 자회사 경영진을 적극 감시하고 책임을 직접 추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도 “모회사 이사들은 자회사의 이사직도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그동안 자회사 이사들에 대해 모회사가 적극적으로 책임을 묻기가 어려웠다”면서 “다중대표소송제가 기업들로 하여금 자회사의 책임경영을 강화, 기업 전체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도록 유도하는 순기능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해외에서도 다중대표소송제는 논란거리

한편 해외에서도 다중대표소송제는 논란의 대상이다. 미국의 경우 다중대표소송제의 일부 부작용을 감안, 일부 주에서만 판례상 엄격한 요건 하에 인정한다.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은 법률로 인정하지만 역시 엄격한 기준을 갖는다. 일본은 지난해부터 제한적으로 다중대표소송제를 시행하고 있다. 모회사 지분율이 100%이고, 자회사의 주식 장부가액이 모회사 총자산의 20%를 초과하는 규모를 가진 자회사에 한해 적용했다.

이번 상법 개정안엔 다중대표소송제 외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사들에 대한 집중투표제(상장사가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소액주주들이 선호하는 이사 후보에게 집중 투표할 권리를 가지는 제도)의 단계적 도입, 우리사주조합 및 소액주주의 사외이사 추천·선출권(회사 내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가 우리사주조합 및 소액주주가 추천한 사외이사를 1인 이상 반드시 선임하도록 하는 것) 도입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팽팽히 맞선 찬반 양론 속에서도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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