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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대학 창업 활성화가 의약·바이오 강국의 첫 단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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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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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우리나라 경제를 지탱하는 반도체와 자동차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의약 시장은 지난 20여 년간 도전의 대상이었으나 변변한 실적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한미약품의 대규모 기술 이전과 일부 바이오 벤처기업의 미국 임상 3상(床) 시작이 낙관의 불을 붙였다. 정부는 여러 지원책을 내놓았고 주식시장에도 기대감이 반영되고 있다. 이제 이런 관심과 열기를 바이오산업 전반으로 확산시켜 성장동력의 발화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초기 임상까지 창업이 최고의 선택
임상 2상 성공하면 대성공 거둬
우리 대학도 상아탑 이념 벗어나
젊은 인재들의 창업 북돋울 때다

우리가 신약 개발의 변방에 머물렀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선진국 대비 턱없이 작은 규모의 국내 제약사, 그에 따른 자금력 부족, 글로벌 기준의 임상시험 수행과 제품 생산 능력 미비, 다양한 전문성을 총괄할 수 있는 경영자의 부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인들은 그간 많이 개선되었거나 설사 모자라더라도 아웃소싱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제한 요인은 신약 개발의 첫 단계인 ‘쓸 만한 발명과 발견’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업가치가 있는 결과가 있으면 그 외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전략과 정부의 정책은 이를 극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신약 개발에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가장 파괴력이 크고 경제성이 높은 것은 당연히 획기적 발명을 통해 원천특허를 확보해 완전히 새로운 약을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거대 바이오기업인 제넨텍과 암젠이 이렇게 발전했다. 다음으로는 현존하는 의약을 현저하게 개량하는 방법이다. 파이는 작겠으나 실패 확률은 좀 낮다. 한미약품의 성과가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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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제약기업의 형편상 자체적으로 원천특허를 개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물론 선진국에서도 이를 담당하는 기관은 대학이다. 실제 거의 모든 블럭버스터 의약품들은 대학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학의 연구성과가 사업화로 연결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회사로 기술 이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대학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에 대해 투자를 주저한다. 기초연구 이후에 투자할 액수가 천문학적 규모인 데 반해, 아무리 좋은 논문을 발표해 찬사를 받아도 실제 임상시험에서는 재현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창업은 최고의 선택이다. 실험실 결과로 창업하고, 에인절 투자나 벤처자금을 받아 초기 임상시험까지 진행하는 것이다. 의약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임상 2상을 통해 유효성과 안전성을 입증한 때다. 창업한 회사가 이런 성과를 얻으면 기술 이전을 통해 큰돈을 벌거나, 대기업에 인수합병되거나, 혹은 임상 3상을 통해 시판허가를 받아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의 바이오기업들이 발전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우리나라 대학이 실생활이나 경제에 도움이 되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학술지 논문으로만 성과를 평가하는 제도로 인해 현학적 연구가 횡행하고, 그 결과는 전문가들의 잔치로 끝난다는 점이다. 다행히 정부는 지난 20년간 유지하던 이 정책을 수정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21세기에 미래지향적으로 대학을 이끌어갈 리더십의 부재다. 선진국에서 대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경제의 동력이 될 만한 이론과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학은 아직도 19세기형 상아탑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돼 학문의 실용적 역할에는 적대적이다. 따라서 창업이나 실용연구가 대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인식되도록 이를 교수 평가의 주요 공식 지표로 사용해야 한다.

또한 창업을 ‘학자의 명예롭지 않은 돈벌이 행위’ 정도로 치부하는 시대착오적 정서가 창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에서는 부교수 이상이 창업을 하도록 되어 있다. ‘젊은 사람은 공부나 해라’라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부교수가 되는 시기는 40세 전후다. 창업은 겁 없이 도전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좌고우면하는 불혹의 나이에 하라니 실정도 모르는 권위적 교수들이 참신하고 당찬 작품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부정적 요인들은 총장이나 학장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다. 탈법이나 불법도 아니고 정부 시책과 사회의 기대에도 부응하는 매우 ‘옳은’ 일이므로 대학 지도부가 비전과 능력이 있다면 정치·사회적 정당성을 갖고 적극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와 의약 분야는 1500조원 규모의 거대 시장이자 고부가가치 제품, 지식기반 산업이라는 특징이 있다. 고학력 사회의 강점과 ‘빨리빨리’ 정신, 신명 나면 밀어붙이는 문화를 가진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 분야다. 성공 여부는 대학 창업에 달려 있다.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리며 마당으로 엄청난 양의 물이 넘쳤다. 황급히 나가 살펴보니 집수정의 덮개 위로 잡목들이 쌓여 있었다. 밤송이 몇 개를 빼내니 순식간에 물이 빠져나갔다. 대학 창업 활성화를 막고 있는 요인들은 삽 한 번만 들어 퍼내면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누가 그 일을 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다. 정부 관련 부처와 대학들의 관심을 촉구한다.

김선영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