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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법 통과 안돼 해결 못한 규제는 4%…규정·선례없다는 말은 핑계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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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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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민
경제부문 기자

“수많은 규제개혁 관련 법안이 국회에 계류가 되어 있는데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아서 앞이 보이지 않고 있다.”

81% 해당되는 783건 해결됐지만
기업이 느끼는 체감도 아직 낮아
공무원이 생각 바꾸면 해법 나와
적극적 시행령 적용 의지 아쉬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청와대에서 제4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19대 국회에 법안 처리를 촉구하며 한 말이다. 법이 제·개정되지 않아 규제가 완화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규제개혁 부진의 화살을 국회로 돌린 셈이다. 이후로도 규제개혁이 지지부진 하다는 얘기가 나오면 국회를 향한 질타가 먼저 나온다. 그런데 과연 국회만 규제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일까.

정부가 운영하는 규제정보포털에 ‘손톱 밑 가시’ ‘경제단체 건의과제’ ‘신산업개선과제’로 등록된 규제는 총 970건이다. 국무조정실이 각종 간담회와 경제현장에서 건의된 내용을 취합한 뒤 해당부처와의 검토를 거쳐 선정한 개선과제들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않아 해결하지 못한 규제는 37건(4%)에 불과하다. 783건(81%)는 처리완료, 160건(15%)는 검토 중으로 분류된다. 처리되지 못한 규제만 따로 떼서 봐도 법안폐기가 원인인 것은 19%밖에 안 된다. 물론 법안마다 파급효과와 경중이 다르겠지만 수치상으로는 규제개혁의 부진이 국회에서의 법 제·개정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처리된 규제개혁 과제의 숫자가 통계상으로 많다고 해서 규제개혁이 잘 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에서 ‘2016년 규제개혁 체감도’는 83.6으로 나타났다. 규제개혁 체감도는 전년도 정부의 규제개혁에 대해 기업들이 얼마나 만족하는지 나타내는 지표다. 100을 넘으면 만족한다는 응답이 더 많고 100 미만이면 만족하지 못한다는 응답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장에서 느끼는 규제개혁 체감도와 만족도가 낮다는 뜻이다.

원인은 지겹고, 단순하다. 국민과 기업들은 법과 규정보다는 소극적인 행정 관행이나 관료들의 성의 없는 태도에 불만을 많이 느끼고 있다. 앞의 조사에서도 기업들은 규제개혁 불만족의 가장 큰 이유로 ‘보이지 않는 규제 개선 미흡’과 ‘공무원의 규제개혁 마인드 불변’을 꼽았다. 최근 만난 핀테크 A사 대표도 비슷한 맥락의 하소연을 했다. “신기술 관련 인·허가 때문에 민원을 제기하면 공무원은 일단 관련 규정이나 선례가 없다는 얘기만 한다. 충분히 규정 안에서 해결할만한 제3의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공무원은 찾기 어렵다”.

사실 규제는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법 개정 사안도 있지만 시행령 적용이나 공무원 권한이 문제가 되는 게 더 많다. 그러나 관료들은 ‘규정이 잘못됐다’는 핑계 뒤에 숨어 민원 서류나 인허가 신청을 미뤄두기 일쑤다. 심지어 상위법을 개정해도 일선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 개정을 포함한 후속조치를 하지 않아 규제 개혁의 실효성을 떨어뜨리는 일도 허다하다.

법을 바꿔도 일선에서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의 인식과 행동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규제개혁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결국 제대로 된 규제개혁을 위해 필요한 건 행정개혁이다. 아쉽지만 지금처럼 관료들이 법 뒤에 숨어만 있는 이상 규제개혁은 또 실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함승민 경제부문 기자 s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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