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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사드 앞에서 호란을 떠올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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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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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한국에서 출발한 유커(遊客) 틈에 섞여 중국 공항에 내리면 진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타원형 수화물 운반대 위로 한국산 전기밥솥과 액즙기, 대형 쇼핑백(‘크리에이티브 코리아’ 면세점답게 바퀴까지 달아놓았다)이 끝 없을 것 같은 기세로 쏟아져 나온다. 주변 여성들 등에는 대략 셋 중 하나꼴로 한국 업체가 인수한 독일 브랜드 가죽 백팩이 얹혀 있다. 유커마다 트롤리 가득 짐을 실은 뒤에야 자리를 뜬다. 대도시 인근 공항은 어디나 그 모습이 비슷하다.

한국 고관대작들은 별도 통로로 바로 나가기 때문에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는, 그 광경 속에서 이런 ‘불온한’ 상상을 해봤다. 어느 날 갑자기 중국 정부가 세관 심사를 강화한다. 1인당 5000위안(약 85만원)어치 초과 물품에 관세를 엄격히 물리고, 신고 안 하고 어물쩍 들고 오는 고가품은 압수한다. 공항에서 일일이 가방을 검사하는 통에 입국에 두 시간 이상 걸린다. 유독 한국발 항공기가 내리면 세관원들이 부쩍 많이 깔린다는 소문이 퍼진다. 달라진 분위기에 놀란 중국인들이 앞다퉈 여행 계획을 취소한다. 한국의 관광·숙박·유통업계에 난리가 난다. 매출의 70%를 유커에 의존하는 한국 면세점에서는 인력 구조조정 얘기까지 나온다. 한국 정부가 외교 채널을 통해 “왜 이러시는 거냐”고 묻자 중국 측은 “세관 당국이 원래 있는 규칙을 원칙대로 적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태연하게 답한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 아무도 모른다. 반도체, 자동차용 배터리, 스마트폰 수출에 장벽이 생기고 드라마를 포함한 한류 대중문화에 없던 규제가 등장할 수 있다. 한국 수출에서 중국(홍콩 포함)이 차지하는 비율은 31%다. 걱정 없다고 아무도 장담 못 한다.

국가의 존엄과 안위가 걸린 일을 위해서는 먹고사는 어려움을 견딜 수도 있다. ‘개·돼지’들이 의병을 일으킨 나라다. 문제는 국민이 그 전제에 동의하느냐다. 병자호란 직전 대사헌 이경석(李景奭)은 “민심이 이미 흩어져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은 과중한 부역에 시달린 나머지 왜 적이 오지 않느냐고 묻는 형편”이라고 인조에게 직언했다. 그때도 ‘헬 조선’을 외친 백성이 많았나 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그 책에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시대의 비망록’이다”고 썼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