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 가족
가로본능 휴대전화 만든 산업디자이너
부모 반대에도 ‘꿈을 찾아’ 디자인과 진학
아침이슬 김민기와 듀엣 ‘도비두’ 활동도
첫째 세계적 요가 강사, 둘째 프로 뮤지션
자녀의 진로가 뭐든 축복하고 응원해줘야
누구나 재능이 있고, 그걸 나누는 게 인생
“비틀스는 우리들에게 좋은 음악을 남겼고, 피카소는 우리들에게 좋은 그림을 남겼고, 스티브 잡스는 우리들에게 사과를 남겼다.
당신은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최근 서울대 공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가 마지막에 한 이야기다. 그가 최근 가장 고민하고 있고 또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였다. 자신의 자녀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딸 리아 킴(김수진)은 과감히 미국 투자은행을 박차고 나와 요가 강사가 되었고 아들 김윤민(MYK)씨는 1인 프로젝트 밴드 ‘솔튼페이퍼’로 활동한다. 리아 킴은 나이키 요가 글로벌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아이들이 나중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 스스로 찾았다. 아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아버지, 김영세 대표를 만났다.
성실하라, 부지런하라, 정직하라
김 대표는 여러 차례 세계 유명 디자인 어워드인 독일의 레드닷·iF, 미국 IDEA에서 수차례 수상한 디자이너다. 그가 세운 디자인 회사 이노디자인은 화면이 가로로 돌아가는 가로본능 휴대전화, 슬라이딩 콤팩트 화장품, 목걸이형 MP3, 휴대용 랍스터 버너 등 발상을 바꾼 수많은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집안의 말썽쟁이”였다. 부모님의 바람과 어긋나는 속썩이는 아들이었다. 4남 1녀의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늘 형의 그늘에 가렸다. 형은 경기고에서 언제나 전교 1등이었다. 모범생이었고 어른들 말을 거역하지 않는 아들이었다. 대학도 당시 우수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던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김대표는 무조건 외우는 게 싫었다. 스스로 “어머니가 원하는 만큼만 공부했다”고 말 할 정도로 공부를 싫어했다. 경기고 재학 시절 음악에 빠져 친구 3명과 함께 ‘다이아몬드 포’(※다이아몬드는 경기고 마크)라는 밴드를 결성해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식으로 유료 공연도 했다. 공연장 좌석이 다 찰 만큼 인기를 모은 공연이었다. 대학 시절엔 노래 ‘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와 함께 포크 듀오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로 데뷔한 적도 있었다.
그의 꿈은 디자이너였다. 디자이너의 꿈을 갖게 된 건 중3 때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펼쳐본 영국 잡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때문이었다. 잡지에서 본 사진 한 장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완강했다.
“당시 70년대엔 산업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어요. 아예 그런 직업을 부르는 호칭도 없었으니까. 의사였던 아버지는 형처럼 공대를 가라고만 하셨죠.”
아버지의 말대로 서울대 공대에 원서를 썼지만 시험은 보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에게 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설명했다. “디자인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에요. 사람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모범생보다 모험생이 되겠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결국 그는 다음 해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미대 재학 시절 상공미술전에 낸 작품이 특선을 받아 덕수궁에 전시된 적이 있었다. 미대 진학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말없이 혼자 그 전시회에 다녀와선 “다른 사람들 얘기가 네 작품이 대통령상이 될 뻔했는데 작품 크기가 작아서 특선이라 하더라”며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어머니 고 박정선씨는 언제나 아들을 응원했다. 학창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내내 아들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고 싶었다. 디자이너로 이름이 알려진 이후에도 어머니는 신문에 나온 그에 대한 기사를 모두 오려 모아두고 가끔 아들에게 보여주며 기뻐했다. 김 대표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고, 덕분에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부모님에게 받은 최고의 유산으로 성실함, 정직함, 부지런함을 꼽았다.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을 부모님으로부터 배웠어요. 그토록 공부가 싫었고, 공부하라는 부모님 말씀을 피해 도망 다니기 일쑤였지만 부모님은 저를 항상 제자리로 이끌어 주셨던 것 같아요. 그땐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런 과정을 통해 삶의 원칙을 세울 수 있었어요.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것, 최소한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요. 그게 몸에 배서 지금까지도 모든 일을 정말 열심히 합니다.”
자녀에게 디자인 의견 묻는 친구 같은 아빠
아들 윤민씨는 김 대표를 “친구 같은 아버지”라고, 김 대표는 “나도 아들에게서 많이 배운다”라고 말한다.
그는 어린 딸과 아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자녀들에게 자신이 디자인한 사진이나 그림을 보여주며 의견을 묻곤 했다.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바로 ‘다음 세대’의 평가라고 생각했다.
“내 디자인의 사용자인 다음 세대가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아이들의 눈을 통해 확인받는 과정이었죠.”
아이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I don’t like it”일 때도, “Looks good”일 때도 있었다. 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에게 굉장히 힘이 됐다. “그게 우리 가족의 파트너십이에요.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거죠. 아빠가 디자인 얘기를 하면 눈이 동그래져서는 열심히 들여다보며 한마디씩 해줬어요. 대화를 많이 하니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두터워졌고요.”
2000년대 초 가로본능 휴대전화는 김 대표 가족의 공동 작품이다. 그가 디자인을 반신반의하며 보여주자 아이들이 “화면이 TV 같네”라고 하는 말에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곧 모델을 만들어 삼성에 제안해 제품화했고, 큰 히트를 쳤다.
“거기 앉아 봐라” 같은 말은 그의 집엔 절대 없다. 그저 재미있는 일상 이야기나 그동안 있었던 일들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김 대표는 “아이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게 애들에게 전달되죠. 아이들은 더 쉽게 마음을 열고요.”
아이들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때도 아버지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 하루는 UCLA 경영학과 졸업 후 LA의 한 투자은행에 다니던 딸 리아가 “투자은행 일을 그만두고 요가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딸이 대견했어요. 딸이 그러더군요. 투자은행은 좋은 직장이지만 평생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겁이 나고 갑갑해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요. 딸이 생각하는 직업이란 ‘그 일을 하기 전부터 설레야 한다’ ‘하는 동안 열정에 빠져야 한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이 3가지를 만족하는 걸 드디어 찾았다고, 그게 바로 요가라고 말하는데 너무 기특하고 자랑스러워서 끌어안아 줬어요.”
아들 윤민씨는 음악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와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느냐고 하더군요. 둘이 밤새도록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다가 새벽녘쯤 음악을 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저 ‘잘했다’고 했고요.”
이노디자인의 슬로건 ‘디자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Design is loving others) 역시 아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었다. 19세 되던 해 5월 ‘어머니의 날’에 아들 윤민씨는 직접 그려 만든 쿠폰북 한 권을 선물로 내밀었다. ‘세차’ ‘창문 닦기’ ‘설거지’ ‘마사지’ 등 자신이 어머니에게 선물로 해줄 일들을 쿠폰 형식으로 그린 책이었는데, 맨 마지막 장의 쿠폰이 ‘LOVE’였다. 쿠폰에는 ‘평생 사랑한다’는 말과 쿠폰 사용기한은 ‘없음’이라고 써 있었다. 김 대표에게 있어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된 말이었다.
선망받는 직업보다 하고 싶은 직업을
그는 스스로 “무슨 일이건 치열하게,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재수 생활도 그랬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미술 공부였지만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던 만큼 밤을 새워가며 몰두해 이뤄냈다. 마침 다음 해 서울대 응용미술학과가 생겼고 어렵지 않게 입학해 디자이너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서울대를 졸업하고도 디자인에 대한 갈증이 가시지 않았던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로 유학을 떠났다. 아내 최금주씨와 결혼한 후였다. 그곳에서 학사 과정을 다시 밟고 석사까지 마쳤다.
더 좋은 디자인에 대한 갈망은 그에게 무모할 정도의 용기를 줬다. 일리노이대 재학 시절 그곳으로 특강을 온 빅터 파파넥 교수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파파넥 교수는 그가 서울대 재학 시절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 『디자인 포 더 리얼 월드』의 저자이자 ‘디자이너는 인간의 존엄성을 1순위로 생각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디자인 개념을 설파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그의 특강이 있다는 소식에 영어도 서툰 그가 강의실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강의에 열중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그는 교수들만 참석할 수 있는 저녁 만찬에 몰래 들어가 파파넥 교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학생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김 대표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놀랍다”며 “그땐 그만큼 절실했고 용감했다”고 말했다.
서툰 영어로 자신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인데 당신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며 “한 학기 동안만이라도 내 지도교수가 되어달라”고 말했다. 파파넥 교수는 놀라며 “한국에서도 디자인으로 유학을 오느냐”며 흔쾌히 지도교수가 되어주겠노라 허락했다. 그 한 학기 동안 그는 일리노이대가 있는 시카고에서 파파넥 교수가 있는 캔자스시티까지 16시간 이상을 운전해 오가며 수업을 들었다.
김 대표는 86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자신의 회사 ‘이노디자인’을 설립하고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그는 자기 생각을 항상 메모로 남긴다. 그 메모들을 모아서 책을 내는데 2001년 『12억짜리 냅킨 한 장』을 시작으로 『이노베이터』(2005년) 『이매지너』(2008년) 『퍼플피플』(2012년)까지 4년마다 한 권씩의 책이 나왔다. 올해는 『퍼플피플 2.0(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을 이달 말 발행할 예정이다.
-4년마다 책을 낸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나도 신기하다. 2001년부터 정확하게 4년에 한 권씩 썼다. 올림픽처럼 말이다. 아마도 4년에 한 번씩은 트렌드가 바뀌지 않나 싶다. 디자인하면서 사람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메모를 한다. 미국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폰으로 메모한 걸 모아 놓으면 책이 된다. 내 고교 동창은 “책을 싫어하면서 무슨 책을 쓰느냐”고 하는데 사실 난 책을 좋아는 것도 아니고 글솜씨가 있거나 돈을 벌려고 책을 쓰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과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낸다.”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하나.
“나는 ‘디자인은 사랑이다’ ‘디자인은 사람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사람들의 생활은 또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에 항상 관심을 가진다.”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다. 본인의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은 점은.
“아버지는 자녀들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동반자였다. 매년 겨울이면 아버지는 형제들과 함께 덕수궁 스케이트장으로 향하곤 했다. 내가 나중에 아이들과 롤러 블레이드를 자주 탔던 것도 내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던지고 요가를 하는 딸이나 음악을 하는 아들의 진로가 걱정되지는 않나.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았다는 게 기쁘다.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에게 재능을 받고 태어난다. 첫 번째 축복은 재능을 하나 얻어서 나온 것, 두 번째 축복은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내가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16세쯤에 똑같이 나와 밤새고 이야기하면서 결국 자신이 음악을 하고 싶어한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내 아이가 자기 하고 싶은 걸 찾았다는 것이 너무 다행이고 대견스럽고 기쁘다.”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이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면 그걸 굉장히 기쁘게 생각하고 지원하고 응원하는 게 부모의 할 일이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건 물질이 아니다. 물질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건 진심 어린 응원의 말 한마디다. 사람은 누구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할 의무가 있다. 기업을 만드는 것도 똑같다. 디자인과 기업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그것을 나누는 것이다. 나눌 수 있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요즘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무엇을 남길 건지를 고민하라’고 말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겠나. 내 아이뿐 아니라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다.”
김영세 대표는
1969년 경기고 졸업
75년 서울대 미술대학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77년 미국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과 학사
79년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과 석사
79년 미국 듀퐁 디자인 컨설팅
80~82년 미국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과 교수
86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이노디자인 설립
90년 미국 IDEA 디자인어워드 수상(이후 2013년까지 5회)
91, 2000년 미국 경제지 ‘비지니스 위크’의
‘1990 베스트 프로덕트’ 선정
97~2008년 한국산업디자인상(KAID) 대상 수상 4회
99년 한국 GOOD Design 대통령상 수상
2001년 대한민국 디자인 및 브랜드 대상‘디자인 공로’ 부문 수상
2005년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자문위원
2005~2014년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제품 디자인상 수상 5회
2005~2014년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디자인상 수상 12회
2008, 2009년 서울 디자인올림픽 홍보대사
2009년 국제공공디자인대상 행정안전부 장관상
2009년 일본 경제지 ‘닛케이’의 ‘세계 10대 디자인 회사’ 선정
2007~12년 국가 경쟁력 위원회 자문위원
2012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 문화훈장(옥관)
2013년 미국 IDEA 디자인 어워드 파이널리스트 수상
(국립중앙박물관 나들길)
2012~15년 경기도 광명시 디자인 고문
현 상명대 미술대학 석좌교수
• 인생의 롤모델: 레오나르도 다빈치. 어릴 때부터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의 미술관과 세계관을 좋아해 아이를 낳으면 레오나르도 라고 영어 이름을 지으려고까지 했다. 딸 이름인 ‘리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 내 인생의 책: 빅터 파파넥의 『디자인 포 더 리얼 월드(Design for the real world)』. 서울대 미대 재학 시절 처음 읽고 감명을 받았다.
파파넥은 ‘디자인이란 사치품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는 인간과 자연을 위한 디자인 개념의 창시자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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