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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전문가를 믿지 않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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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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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 등 현대 의학을 전면 부정하는 저술로 유명세를 치른 자칭 의학 전문 작가 허현회씨가 지난 8일 원주의료원에서 사망했다. 병원에 가지 말라던 그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그는 지난해 9월 자신이 운영하는 회원 6000여 명의 인터넷 카페 ‘약을 끊은 사람들’에 글을 하나 올렸다. 의사가 결핵 의심 소견을 내며 격리실이 있는 병원으로 옮기라고 권한 데 대해 컴퓨터단층촬영(CT)을 거부하고 6인실을 요구하면서 ‘돈이 안 되는 환자라 병원이 내쫓았다’고 주장했다. 얼마 뒤에는 ‘중증 당뇨와 폐결핵 3기로 부득이하게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증상이 더 악화돼 자연치료법으로 돌아오니 호전되고 있다’는 근황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5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이러니하게도 SNS 상에서는 병원과 의사를 믿지 말고 치료나 약을 거부하라던 그의 죽음을 계기로 ‘아프면 병원에 가고 처방전대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글이 넘쳐난다. 누구는 트위터에 ‘자신의 죽음으로 사기꾼이 아니라 그저 해로운 멍청이였다는 걸 보여줬다’지만 문제는 허씨의 죽음으로도 이런 유의 혹세무민은 끊이지 않고 계속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엄마 카페에선 열이 나도 해열제를 주지 말라는 교조주의적 자연주의 육아 서적이 대유행이고, 미국에선 “제약회사와 과학자에게 속아왔다”는 말로 시작해 백신이 자폐를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12세 소년의 페이스북 영상 조회 수가 400만 건을 넘어섰다. 나 역시 평소 웬만한 감기나 가벼운 병엔 병원은커녕 약도 안 먹는 사람이지만 자기 자식은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비과학적 방법을 맹신하는 걸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난다.

하지만 세상은 거꾸로 과학과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넘쳐난다. 타임이 선정한 100인의 사상가(2010년)인 의사이자 저술가 아툴 가완디는 지난달 캘리포니아공대(칼텍) 졸업식 축사에서 과학자의 권위가 추락한 시대를 살아가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과학의 발달로 지난 세기 평균 수명이 두 배로 늘었지만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보다 직관을 더 신뢰한다”며 “세상에 한번 퍼진 생각을 지우는 건 매우 어렵다”고 했다. 그는 “그럴수록 경력 없는 가짜 전문가를 내세워 음모론을 펼치고 입맛에 맞는 연구 결과만 과장해 진실을 호도하는 의사과학(pseudoscience)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잘못된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조언이 아닐까 싶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