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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젠 말할수 있다"임기 넉달 남기고 말문 연 유태흥 대법원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저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발의됐던 사실은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읍니다. 세계역사에 전례가 없던 일이었으니까요』
법관인사파동→대한변협의 사퇴권고→야당의 탄핵발의등 잇단 회오리 바람속에서 시종 침묵을 지켜오던 유태흥대법원장(66)이 임기만료 4개월을 남겨놓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직후인 81년4월 제8대 대법원장에 취임했던 유대법원장은 부임직후의 비서관 독직사건을 비롯, 소아마비법관의 임명탈락파동, 법관인사파동등 역대 어느 누구보다 어려움을 겪어온 외로운 「사법부의 수장」이었다.
9일하오 그의 5년임기를 마감하는 전국법원장회의를 주재하고 나온 유대법원장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이젠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든것을 털어놓을수 있다는 듯 재임 4년 8개월을 얘기했다.
6척 가까운 장신에 깊이 팬 주름살, 깡마른 체격이지만 활달하고 소탈한 성품을 지닌 유대법원장은 이날 특유의 큰 제스처도 잊지않았다.
-오랫동안 애많이 쓰셨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점도 많으셨을텐데….
▲정말 어려웠습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법관만큼 고뇌해야 하는 법관은 없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한국적특수성과 법정신이라는 두개의 저울 사이에서 번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은 유대법원장께서 친정부적이라는 비평을 많이 하고 있는데….
▲저는 취임사에서도 「국가안위를 위해서라면 법률해석이 달라질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을만큼 무엇보다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지론을 오해한데서 나온 얘기로 봅니다. 내 지론대로 하면 본의 아니게 정부측이 반사적 이익을 얻게돼 친정부적이란 평판을 듣는것이지요. 저는 설사 현재의 야당이 집권한다해도 같은 목소리로 말할 것입니다.
-특히 법관인사파동의 후유증이 심각하지 않았습니까. 변호사단체에서는 사퇴권고까지 한적이 있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인사권자의 당연한 의무이행이었고 잘못없는 인사조치였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인사배경을 잘 모른채 인사가 법관신분보장의 원칙에 크게 위배된듯이 보도한것이 원인이지요. 재야 법조인이나 정치인들도 이런 오해로 탄핵발의 사태까지 벌어진 것입니다.
-서태영판사를 서울민사지법발령 하루만에 울산지법으로 전보시킨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개개의 법관인사에 대해서는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경우 인사에 대한 외부투고로 사법부내 하극상을 일으켜 품위에 문제가 있다고보고 징계하려 하다가 보다 가벼운 인사조치로 대신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고유권한입니다.
-인사파동후 지금의 소신은….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쓰다가 오얏도둑으로 물린 격이지만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때나마 사법부의 위신과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점에서 미안하고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인사파동후 법관들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견해가 다를수도 있겠지만 많은 법관들은 인사조치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묵묵히 자기의 맡은바 직무를 잘 해내지 않았읍니까.
-법관은 판결문으로써 모든것을 밝히는것이 상례인데 최근 어느 법관은 판결문 외에 장문의 훈계문으로 화제가 된일이 있는데….
▲대법원규칙상 재판장은 판결을 하면서 훈계를 할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다만 별도로 강문의 훈계문을 만든 점은 이례적인 일입니다만…(유대법원장은 별로 탐탁지않게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사법권독립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들 얘기하는데….
▲(한참 생각하다가)70년대 의사법파동이나 몇건의 위헌판결에서 보듯이 꾸준한 노력은 했었다고 봅니다. 저의 재임중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고숙종피고인등 4천2백41명이나 됩니다.
이 숫자는 우리법관의 독립성에 이상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사법부는 국민기본권 최후의 보루이고 인권은 어느 상황에서도 유보될수 없는것 아닙니까.
▲아직은 그렇게 볼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머리속의 투철한 국가의식으로 국가안보와 질서유지에 이바지하고, 가슴속의 인권사상으로는 기본권보호에 힘쓰는 두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지요.
-최근 말썽이 되고 있는 상고허가제도는 어떻게 보십니까.
▲81년 이 제도 시행이후 무익한 상고가 제한되는등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봅니다. 3심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항소심을 층실히 강화하도록 하겠읍니다.
-퇴임후는 무얼하시겠읍니까.
▲2∼3개월 쉰뒤 생각해 보아야지요. 대법원장출신이 가방들고 변호사개업을 해도 괜찮을지….
61년 부인과 사별, 노모 임동순여사(87)와 살고있으며 2남2녀를 두고있다. 서예와 요가·골프로 여가를 보낸다. <김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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