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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 기업들의 정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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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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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소설가

지난달 발표된 삼성전자의 ‘문화 혁신’이 관심을 끌었다. 직급을 줄이고 수평적 호칭을 쓰도록 하고 회의를 줄이며 복장과 근무 행태를 간편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자잘해 보이지만 사회적 풍토에서 나온 관행들을 바꾸는 일이라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개선의 시도는 삼성전자가 세계적 기업으로 자라났으므로 기업 문화도 걸맞게 진화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물론 삼성전자가 가는 길로 다른 계열사들도 따라갈 것이다. 며칠 전에 나온 ‘삼성 소프트웨어 백서’도 마찬가지다. 소프트웨어 능력이 경쟁 기업들에 뒤지는데 특히 “소프트웨어의 큰 그림을 그리는 건축(architecture)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리고 ‘경직된 기업 문화’를 바꿔서 소통이 자유로워야 그런 약점이 개선될 수 있다는 처방이 따랐다.

실은 삼성이 주력 산업들을 선정하고 비주력 계열사들을 매각한 것도 성격이 같다. 세계적 기업은 경쟁력을 지닌 분야들에 집중하고 나머지 계열사들은 비교 우위를 가진 경쟁사들에 넘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 기업 생태계가 미약했던 시절엔 ‘선단 경영’이 합리적이었지만 공급 사슬을 걱정하지 않게 된 지금은 몸집이 날렵해야 한다. 그런 ‘선택과 집중’은 세계적 표준 처방이 되었다.

그래도 부조(父祖)가 힘들게 세워 정성껏 가꾼 기업들을, 그것도 건실하게 이익을 내는 기업들을 파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발상 자체가 힘들고 결행은 고뇌 속에 다져진 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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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변혁은 먼저 기업의 정체성을 또렷이 설정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변화들을 제시하는 것이 순서다. 제시된 정체성에 동의하면 구성원들은 기꺼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것의 구현에 나선다.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자기를 다듬어낸 역사적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자산으로 삼아 미래에 자신이 지닐 모습을 그려낼 때 비로소 정체성을 갖춘다. 즉 과거에 바탕을 두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삼성은 복을 누린다. 호암 이병철 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을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그래서 늘 삼성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합치되는 길을 고르려 애썼다. 이것보다 기업의 성공과 영속에 나은 처방은 없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삼성의 정체성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는 명언은 이건희 회장이 정체성을 깊이 모색했음을 말해 준다. “10년 뒤의 먹거리를 걱정한다”고 이 회장이 토로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래도 우리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분이 있구나’ 하고 안도했다. 덕분에 삼성은 작은 나라에 바탕을 둔 지역적 기업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처럼 좋은 유산을 지녔으므로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의 역사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다듬을 수 있다. 세계적 기업이라는 큰 틀 안에서 나름의 문화를 갖추고 목표와 전략을 마련할 수 있다.

삼성의 새로운 정체성은 호암의 경영 철학을 새롭게 다듬으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업보국’의 정신을 확장시켜 사업으로 인류를 섬긴다는 자세는 새 시대에 맞는다. 더 나아가 지구 생태계 전체를 위한다는 목표도 제시할 수 있다. 사람이 생태계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에서 나온 겸허한 자세이므로 그것은 ‘친환경’과 같은 구호와는 차원이 다르다.

삼성이 누리는 이런 행운은 또한 힘든 과제도 부과한다. 호암의 ‘사업보국’ 철학은 ‘인재제일’이라는 지침을 낳았다. 그래서 삼성 사람들은 뛰어날 뿐 아니라 자부심과 충성심이 유난히 크다. 삼성이 다른 기업들보다 늘 한발 앞설 수 있었던 비결이 그것이다.

이제 해외 인력이 많아졌으니 삼성을 ‘또 하나의 직장’으로 여기는 사원이 많을 것이다. 갈 곳 많은 고급 인력은 특히 그러할 것이다. 앞으로 세계적 기업의 면모가 더욱 짙어지면 그런 사무적 관계도 짙어질 터이다.

그래도 삼성 사원들이 지닌 자부심과 충성심은 그냥 놓치기엔 너무 소중한 자산이다. 만일 기업 문화를 혁신하면서도 그런 무형적 자산을 지킬 수 있다면 삼성은 경쟁이 점점 심해지는 환경 속에서 ‘엣지’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다듬는 과정에서 ‘인재제일’이라는 지침을 어떻게 진화시킬 것인지 삼성은 깊이 고뇌해야 할 것이다.

무역 의존도가 유난히 높으므로 우리 사회에선 작은 기업들이라도 세계적 기업의 특질을 다소간 지닌다. 세계적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듬어 내고 거기에 맞춰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어 나가는 일은 우리 기업들이 맞은 근본적 과제다. 이번에 삼성이 시도한 변혁은 자잘해 보이지만 그 뜻은 자잘하지 않고 삼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