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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빠순이? 그들에겐 연대·우정의 공동체 가치 존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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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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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왼쪽) 전북대 교수와 딸 지원씨. 빠순이 현상을 소통·연대·결속·우정 등 공동체적 가치 차원에서 분석한 책을 함께 펴낸 연구 동지다. [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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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딸이 ‘빠순이 예찬론’에 의기투합했다.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인물과사상사·사진)를 함께 펴낸 강준만(60)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와 딸 지원(25)씨다. 이들은 열성팬을 얕잡아 부르는 말 ‘빠순이’의 세계를 “‘소통 불능’ 환경에 처한 10대 청소년들에게 그 어디서도 맛보지 못했던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는 창구”라고 치켜세우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빠순이는…』 책 함께 내고 인터뷰
“팬클럽, 소통 꽉 막힌 10대의 탈출구
사회의 삐딱한 시선 또 다른 성차별”
“팬덤 문화를 양지로 끌어내는 작업
근엄에 집착하는 풍토 바꿀 수 있어”

책의 모태는 ‘동방신기 빠순이’로 10대를 보낸 지원씨의 리포트다. 아버지가 재직하는 전북대 신문방송학과에 다녔던 지원씨는 2013년 대중문화론 수업 과제로 팬덤 현상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주로 자신과 주변 친구들의 경험담을 풀어낸 내용이었다. 여기에 아버지의 학문적 욕심을 더한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60여 편의 관련 논문과 책을 참고, 이론적 토대를 다지면서 ‘소통 공동체’로서의 빠순이 문화를 분석했다. 6일 전북대에서 만난 강 교수는 “직업병 때문에 공연히 끼어들어서 처음에 술술 읽혔던 원고를 버려놓은 것 같다. (딸에게) 진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덕분에 좀 더 깊이있는 주제가 됐다”는 딸의 대답이 이어지며, 인터뷰는 훈훈한 ‘부녀유친’ 분위기로 시작됐다.

이들의 주장은 “빠순이들에겐 소통·연대·인정·결속·우정 등 공동체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전통적인 공동체가 붕괴돼 순수한 관계의 소통이 꽉 막힌 상황에서 빠순이 공동체가 알게 모르게 출구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짚었고, 지원씨는 “친구도 가족도 자주 만날 수 없었던 고교 시절, 어딘가에 확실히 소속돼 동질감을 느낄 대상이 필요했고 동방신기 팬클럽 활동이 그 욕구를 채워줬다”고 털어놨다.

‘취향 공동체’로서의 팬덤에게 중요한 요소는 재미와 소속감이다. “스타는 그만둬도 ‘팬질’은 못 그만둔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팬들 사이의 연대감 자체가 매혹적인 요소다. 지원씨는 “콘서트장 앞에서 줄 서 기다리는 동안 옆 사람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곤 했다”고 말했다.

또 성적과 재력·권력 등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인정의 통속화’ 사회에서 팬덤 공동체는 다양한 방식의 ‘인정 투쟁’에 도전할 용기를 주는 장이기도 하다. 팬클럽 활동을 통해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훈련을 쌓는가 하면, ‘나의 아이돌’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설득하는 노하우를 익힐 수도 있다.

또 스타에게 선물을 보내는 ‘조공’ 문화가 스타의 이름으로 선행을 하는 기부 문화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빠순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머리가 비었다” “한심하다” “상술에 놀아나고 있다”라며 무시하고 손가락질한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빠순이 폄하’는 살인적인 입시체제 유지를 위한 전 사회적 차원의 암묵적 음모”라고 못박았다. “빠순이가 일탈이 돼야 열심히 학교에서 공부하는 애들이 이상적 모델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또 “‘어린’ ‘여성’에 대한 나이 차별, 성 차별적 요소도 강하다. 최근 문제로 불거진 여성혐오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빠순이 문화를 양지로 끌어내는 작업이 우리 사회에 숨통을 틔워줄 것으로 전망한다. “진지하고 근엄한 일만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풍토를 바꿀 수 있다”(강 교수), “대중문화를 더 자유롭게 즐기는 데 도움이 된다”(지원씨)는 기대에서다.

부녀의 빠순이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강 교수는 “특정 인물 중심으로 팬덤 문화를 살펴보겠다”고 했고, 현재 미국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지원씨는 “팬덤 내부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주=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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