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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억울공화국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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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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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층간소음만이 문제였을까. 34세 김모씨가 층간소음 갈등 끝에 윗집 노부부에게 흉기를 휘두른 사건 말이다. 그는 두 달이라는 시간을 들여 몰래카메라를 구입, 피해자 집 앞에 설치했고 현관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때를 기다리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그가 경찰에 밝힌 범행 동기에 답이 있다. “두 차례 항의를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작심 범행 뒤엔 노부부에게 자신의 항의가 묵살당했다는 억울함이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가 무직이었다는 점도 “나를 무시해도 된다는 거냐”고 앙심을 품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무시당해서 죽였다”는 범행 동기, 근래 곳곳에서 부쩍 많이 들린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사장이 월급도 올려주지 않으며 나를 무시했다”(지난 5월 대구 건설회사 사장 살인사건) 등등.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억울함은 인간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그 감정의 칼끝이 타인을 향하면 살인, 자신을 겨누면 자살이 된다. 그러고 보니 자살한 33세 검사도 부장검사의 지시가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껴져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억울해서 죽이고, 억울하게 죽는 사회.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사회 어디를 가든 억울하다는 사람이 넘친다. 보수도 진보도, 20대도 60대도, 남자도 여자도 각자 나름의 이유로 억울하다. 최근 한 보수단체가 연 행사에서 60대 여성 참석자가 “우리 보수까지 탄압을 받으니 너무 억울하다”며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외쳐 동료들에게 박수를 받는 걸 봤다. 그 행사장 옆엔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기한을 연장하라며 시위 중이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억울하다. 가히 억울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소소한 각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억울닷컴’이라는 웹사이트까지 생겼다. 한 매체가 운영하는 이 사이트는 각종 억울한 사연의 종합선물세트다. “연봉 4200만원인 30대 초반 남자인데 여자친구에게 미래가 안 보인다며 차였다”부터 “나이 어리다고 무조건 반말을 하는 할아버지가 짜증 난다” 등 각종 사연이 부글거린다.

문제는 이 억울함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는 점이다. 해답이 있느냐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속 시원한 해법이 정치권에서도 사회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으니, 억울하기가 짝이 없을 지경이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