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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진 수요일] 춤추고 노래하고 마술하고…거리에서 꿈을 꾼다, 우리는 버스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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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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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홍익대와 신촌 주변은 마치 거대한 OST 음반 같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기분 좋은 선율이 거리에 울려 퍼지죠. 그 선율을 따라가면 상큼한 청춘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거리의 청년 뮤지션, 버스커(busker)들입니다.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버스킹은 청춘의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기타 하나 둘러메고 거리 공연을 펼치는 청춘이 많습니다. 거리에서 피어나는 음악의 꽃, 버스커들을 만나봤습니다.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청춘리포트 - 길 위의 예술가들

거리를 무대로 펼쳐지는 공연을 의미하는 버스킹(busking). ‘길거리에서 공연하다’는 의미의 버스크(busk)에서 유래된 용어다.

버스킹의 세계엔 편견이 없다. 갖가지 스펙을 줄줄이 나열한 입사 지원서도, 바늘구멍 취업 경쟁률을 뚫을 필요도 없다. 음원 수익이나 팬 투표 같은 성과 지표도 없다. 대신 버스커(busker·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거리를 지나치다 멈춰선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를 먹고산다. 특별한 무대 장치나 소품이 없어도 아스팔트나 보도 위에 자리를 잡고 저마다의 청춘의 꿈을 펼친다.

2년째 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퍼포먼스 그룹 ‘행복을 배달하는 사람들’의 오광선(30)씨는 버스킹을 “사회의 편견에서 벗어나 오로지 몸짓과 소리로만 사람들과 교감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버스킹은 청춘을 담보로 하는 기약 없는 도전이기도 하다. 몇몇 유명 버스커들을 제외하곤 거리에서 얻는 수입은 한정적이다. 버스킹 자체에 대한 열정이나 미래에 대한 꿈 없이는 쉽사리 뛰어들기 힘들다. 그래서 일부 버스커들은 다른 직장이나 아르바이트로 ‘투잡(two job)’을 뛰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오늘도 미래에 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각양각색의 공연을 펼치고 있는 ‘거리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지난 3일 오후 6시, 홍대 ‘걷고 싶은 거리’ 곳곳엔 작은 소극장이 펼쳐졌다. 버스커들이 멈춰선 거리는 무대가 됐고 행인들이 모여든 보행로는 객석이 됐다.

| 홍대앞 마술사 이세민씨
“첫 관객 3명 모으는 게 가장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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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홍대·신촌 등 젊음의 거리에선 ‘거리의 예술가’들이 펼치는 각양각색의 공연이 벌어진다. 댄스·마술·랩·발라드·기타 연주 등 장르도 다양하다.

거리 한쪽에 자리 잡은 이세민(29)씨가 흰색 스카프를 꺼내 들고 흔들었다. 이씨는 올해로 3년차인 마술 버스커다. 주변을 무심히 지나치던 행인들 중 3명 정도가 그런 이씨를 보고 멈춰섰다. “스카프 좀 대신 들어주시겠어요?” 한 관객이 스카프를 들자 이씨가 지팡이로 스카프를 툭툭 쳤다. 스카프에서 갑자기 커다란 공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행인 20여 명 정도가 이씨 곁에 모여들었다.

이씨는 “첫 관객 3명 정도를 모으는 게 가장 힘들다. 일단 가장 신기한 마술로 눈길을 끌면 호기심을 지닌 관객들이 여럿 모여든다”고 웃어보였다. 지방대 법대를 다니던 이씨는 5년 전 홍대의 놀이터에서 마술 공연을 관람한 뒤 이 일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거리 공연으로 일주일에 50만원 정도를 번다. 이씨는 “마술사 이은결처럼 유명한 스타보다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마술사가 되고 싶다. 거리에서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환호를 받으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 군인 출신 기타리스트 정선호씨
“버스킹은 무에서 유 창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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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홍대 거리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있는 버스커 정선호 씨. [사진 프리랜서 서영민]

다른 편 거리에선 정선호(33)씨가 기타 연주를 펼치고 있었다. 그가 현란한 손놀림으로 자작곡 ‘빅 블루 오션(Big Blue ocean)’을 연주하자 관객 1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파도타기를 하고 환호하며 정씨의 연주에 화답했다. 원래 정씨는 군인이었다. 5년간 부사관으로 군에서 복무했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던 기타리스트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6년 전 중사로 전역한 뒤 무작정 거리로 나가 기타를 연주했다. 처음엔 모든 게 막막했다. 소속사들은 정씨를 외면했고 마땅한 수입도 없었다. 하지만 거리를 돌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을 발굴해 활로를 열었다. 그는 한 손으론 기타를 연주하고 다른 손으론 현란한 안무를 펼치는 퍼포먼스로 유명세를 얻었다. 2014년 ‘킹오브버스킹’ 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2015년 ‘라이징스타 버스킹’에서 우승했다. 최근엔 ‘에어라이브 글로벌 뮤직콘테스트’ 예선을 1위로 통과했다. 정씨는 “버스킹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퍼포먼스다. 버스킹을 뿌리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서울 신촌에서도 거리 곳곳에서 버스킹 무대가 펼쳐졌다. 2014년 1월 대중교통전용지구(차 없는 거리)가 조성된 이후 신촌에선 버스커들의 공연이 활기를 띠고 있다. 좁은 길가에 자리 잡고 열심히 음향장비를 설치하는 버스커 김동진(22)·주향윤(30)씨가 눈에 띄었다. 검은색 반바지에 흰 티를 입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그들은 주목하는 관객은 없었다. 하지만 단출한 의자에 앉아 발라드 곡을 연이어 불렀다. 김씨에겐 노래를 부르는 내내 눈을 감는 버릇이 있다. 세 번째 노래가 끝났을 즈음 이들의 주변에 관객 20여 명이 몰렸다. 김씨는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눈을 감고 노래를 시작하다가 노래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모여든 관객들을 보는 게 신기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이날 김씨는 네 시간 동안 총 30곡의 노래를 열창했다.

| 퍼포먼스 그룹 ‘행복 배달’
“가수 데뷔하는 팀원 생겼으면?

깔끔하게 네 곡 부르고 갈게요.”

50m쯤 떨어진 거리에선 퍼포먼스 그룹 ‘행복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래퍼 모성환(35)씨가 랩을 쏟아내자 50여명의 관객이 모였다. 이 그룹은 개그맨 지망생 오광선(30)씨와 임길수(30)씨가 만들었다. 회원수 200여 명의 팬카페까지 생길 정도로 버스킹 쪽에선 이름을 알리고 있다. 랩·댄스 등 모든 장르를 망라한 공연이 이 그룹의 매력 포인트다. 임씨는 “공연으로 팀을 구성해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차리는 게 꿈”이라며 “소속 팀원들 가운데 인기를 얻어 가수로 데뷔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길 기대한다”고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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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킹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주로 20~30대 젊은 층이었다. 두바이에서 12년을 살다가 6월 초 귀국한 장은하(20)씨는 “처음 보는 뮤지션들의 노래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호흡을 하며 들을 수 있다는 데서 매력을 느꼈다. 앞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매주 홍대에 버스킹을 보러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민주(20)씨는 “기존 가수들과 달리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버스킹의 장점”이라며 “일정한 형식이나 좌석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연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버스킹은 유명 뮤지션의 배출 창구로도 이름이 높다.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장범준과 그룹 십센치(10㎝)는 홍대 등지에서 버스킹 전문 밴드, 보컬로 이름을 알렸다. 인디밴드계에서 ‘홍대여신’으로 불리며 명성을 쌓은 가수 요조도 대표적인 버스커 출신이다. 

손국희·김유빈·서준석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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