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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한국 소비자는 왜 차별받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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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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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나는 한국 소비자 의식이 낮아서 무시당한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소비생활에서도 공공선을 추구하는 소비자시민성을 실현하고 소비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칼럼을 쓴 것도 그래서다. 물론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요즘은 ‘뭣이 더 중한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폴크스바겐과 이케아의 행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존중도 받아본 사람이 계속 존중받고 존중할 줄 알게 된다’는 생각.

폴크스바겐은 미국 소비자들에게 18조원 가까운 배상금을 주기로 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 직전인 지난해 9월 중고차 시세로 차를 되팔거나 공짜로 리콜받을 수 있고, 배상금도 최고 1만 달러(약 1200만원)를 추가로 받는다. 이케아는 미국에선 유아 압사사고를 일으킨 서랍장을 리콜하면서 한국은 제외했다. 고정시키는 고리를 줬으니 벽에 박아놓고 쓰라는 거다. 그런데 미국에선 오히려 가구를 벽에 고정시켜서 쓰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 서랍장은 세워두고 쓰는 물건이다. 우리 생활권에선 열면 앞으로 쓰러지는 서랍장은 쓸 수 없는 물건인데도 이 다국적기업은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벽에 박으란다.

미국 소비자 앞에선 약해지고, 한국 소비자는 무시하는 기업의 행태는 차별이다. 한데 이런 차별이 소비자 의식의 높고 낮음 때문에 생긴 건 아니다. 미국의 소비자보호제도가 무서워서다. 미국은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힌 기업엔 가혹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린다. 한 예로 최근 미국에선 존슨앤드존슨 베이비 파우더 속에 든 탈컴(talcum) 성분 때문에 난소암이 발병했다며 소송을 낸 여성의 유가족에게 5500만 달러(약 600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이 중 징벌적 손해배상액이 5000만 달러다. 기업들이 미국에서 서둘러 배상하는 건 빨리 소비자 보호 활동을 하는 게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폴크스바겐은 “한국은 미국과 달라 배상을 못하겠다”고 버틴다. 국내 소비자들이 아무리 항의하고 집단소송을 하겠다고 압박해도 기업은 모르쇠다. 버티는 게 이익이라는 걸 그들도 알아서다. 실제로 우리 정부엔 소비자 보호 개념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자동차 관련 부처들을 상대로 디젤 게이트 관련 취재를 하면 이런 대답을 듣게 된다. “자동차 운행 관련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산업자원부), “배출가스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국토교통부), “폴크스바겐 리콜계획서를 반려했는데 아직 안 낸다”(환경부).

법과 판결도 소비자 보호엔 인색하다. 사소한 소비자 보호는 소비자보호원에서 하지만 소비자가 생명을 잃은 가습기 살균제처럼 치명적인 제조사·소비자 갈등은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라고 미룬다. 법원에 가도 피해 입증 책임은 피해자에게 있어 기업 상대 소송은 화해나 패소로 끝나기 일쑤다. 피해 고발도 쉽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검찰이 눈을 돌리게 하는 데에만 피해자들이 5년 넘게 줄기차게 호소하고, 방송사가 수차례 탐사보도를 해야 했다.

입법부도 마찬가지다. 가습기살균제 사태 이후 심각한 피해를 유발한 기업 책임을 강하게 묻는 ‘피해구제특별법’이나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입법부는 귀를 닫고 있다. 기업들은 규제 때문에 한국에서 사업하기 힘들다고 아우성이지만 실은 우리나라 정부 일원이 힘을 합쳐 소비자 보호엔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이 상당수 기업이 소비자를 등치고 무시하면서 성장했다.

입법·사법·행정 자체가 미국에선 기업이 소비자 보호를 서둘러 과감히 하는 게 이익이고, 한국에선 회피할수록 이익인 구조다. 다국적기업들이 한국에선 한국식대로 무시하고 배짱을 부려도 마땅히 제재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이익 추구가 목표인 기업들이 미국과 한국 소비자를 차별하는 것도, 소비자로 보호받은 기억이 없는 소비자들이 이기적이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이제 우리 소비자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높은 소비자 의식을 갖게 하려면 정부가 먼저 대답을 내놔야 한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