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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끝내 일을 낸 ‘EU 괴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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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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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1996년 2월 29일 평소에도 별로 점잖지 않은 영국 신문에 ‘충격 보도’풍의 기사가 실렸다. 유럽연합(EU)이 콘돔 크기를 규제하기로 했는데 최단 길이가 17㎝로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미터법 단위에 익숙지 않은 이들을 위해 ‘6.7인치’라는 설명도 붙였다.

충격의 이유는 당시 영국 정부가 정해놓은 콘돔 제조 기준이 최소 6.3인치(16㎝)라는 데 있었다. ‘영국 남자의 굴욕’ 등의 표현을 담은 대중지 기사들은 EU 때문에 ‘평균 사이즈’ 차이가 들통났다는 식으로 독자들을 자극했다. 그러면서 ‘EU 관료들’이 이불 속도 통제하려 든다고 비꼬았다.

그 뒤 1㎝ 차이는 평균 사이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영국에서 생산되는 콘돔은 오래전부터 18㎝ 이상으로 만들어져 왔다는 올바른 보도가 나왔다. 정론지들은 그 규격을 제시한 것은 EU가 아니라 유럽표준화위원회(CEN)라고 설명했다. CEN은 EU 회원국이 아닌 스위스·노르웨이도 가입한 별도의 조직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대중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전에는 바나나가 문제가 됐다. EU에서 길이가 14㎝(5.5인치라는 설명이 첨부) 미만이거나 지나치게 굽어 있는 것은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는 보도 때문이었다. 영국 언론들은 바나나 길이 측정 방법이 애매하다며 비아냥거렸다. 양쪽 끝 사이의 직선 거리인지, 바나나 형태 그대로의 곡선 길이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EU는 14㎝ 미만 바나나를 시장에서 내쫓은 적이 없다. 그 길이는 최상급 바나나를 분류하는 기준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영국인은 EU가 작은 바나나는 못 팔게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EU 집행위원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Euromyths(유럽 미신)’라는 공간이 있다. 영국에 퍼진 600개 이상의 ‘EU 괴담’에 대한 해명을 모아놓은 곳이다. EU가 영국 2층버스 운행을 금지시킨다, 양배추 생산 관련 규정이 2만6911개 단어로 돼 있다 등 주로 영국 황색 언론이 퍼뜨린 허위 사실을 반박하고 있다. ‘브렉시트’에 앞장선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이 기자 때 쓴 ‘EU가 새우맛 감자칩 판매를 금지하려 한다’는 기사도 포함돼 있다.

더선, 데일리메일, 데일리익스프레스 등 괴팍하기로 유명한 영국 대중지들은 20년 이상 쉴 새 없이 반(反)EU 정서를 키웠다. 51.9%의 브렉시트 찬성 배경에는 이들의 거두절미·침소봉대 보도도 있다. 큰일에는 꼭 엉터리 언론이 한몫을 한다.

이 상 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