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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제2의 스위스'된다는 영국의 망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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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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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지난달 제주도에서 열린 제주평화포럼 만찬장에서 한 저명한 중국 학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인기가 급상승하던 때라 화제는 왜 미국인이 그를 지지하는가로 옮겨졌다.

그의 진단은 이랬다. “자신의 삶과 세상에 분노한 이들은 결과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변화를 원한다”고. 그러면서 그는 “그게 미국에서는 트럼프 지지로, 영국에선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나타난다”며 “요즘 중국인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많은 심리학자는 브렉시트를 ‘격정범죄(crime of passion)’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격정범죄란 분노와 같은 순간적 감정으로 장기적 판단을 거른 채 저지르는 불법 행위를 뜻한다. 브렉시트 역시 소외계층의 분노가 폭발해 이뤄진 근시안적이고 비합리적 결정이라는 것이다.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유럽연합(EU) 탈퇴가 번영을 가져올 거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이들은 항상 예로 드는 게 스위스다. 영국독립당 나이절 패라지 당수는 “자신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스위스인을 보라. 행복하지 않느냐”고 늘 강조했었다.

스위스가 1992년 국민투표에서 EU 전신인 유럽공동체(EC) 참가를 부결시켰지만 최고의 부국인 건 사실이다. 지난해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8만675달러(약 9460만원)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다. 영국(4만3771 달러), 미국(5만5805 달러)과 비교가 안 된다. 이에 대해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스위스의 번영이 EU로부터 독립한 덕이라고 주장한다. 천문학적 기여금을 낼 필요도 없는 데다 자신에 맞는 무역정책을 폈기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다. 스위스의 성공은 EU와의 결별이 아닌 유별난 근로정신 때문이라는 거다.

실제로 지난 5일 스위스에서는 특별한 안건을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됐었다. 안건의 내용은 소비 진작을 위해 1인당 월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씩을 무조건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공돈을 준다는 데 세상에 이렇게 좋은 정책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결과는 압도적 부결이었다.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꺾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2014년에는 법정 유급휴가 기간을 4주에서 6주로 늘리자는 법안이 부결됐었다.

영국인들에게 이런 의식이 없는 한 EU에서 탈퇴한다고 거저 제2의 스위스가 될 턱이 없다. 홧김에 저지른 브렉시트가 ‘영국의 자살골’이 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남 정 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