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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립주의 넘을 ‘거대한 원’ 만들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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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4 면

브렉시트가 결정된 24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트레이더들이 고민에 빠져 있다. 이날 다우지수는 전날보다 3.39% 떨어졌다. [뉴욕 AP=뉴시스]

설마 하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현실이 됐다. 박빙의 영국 국민투표 결과를 반영하듯 브렉시트의 영향을 두고 세계의 싱크탱크들은 다양한 견해를 내놓았다. 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국제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고 당분간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될 전망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외환·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으로만 국한해서 평가한다면 떨어지는 가지만 바라보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그 가지를 떨어뜨린 거센 바람에 주목해야 한다.


그 바람의 정체는 바로 신(新)고립주의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세계의 경제·정치·사회 통합 과정을 읽어내는 프레임은 세계화였다. 반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속도와 방향 모두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세계화 과정의 반작용으로 나온 신고립주의의 물결이다.

이 바람은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의 국민투표뿐 아니라 미국의 대선도 강타하고 있다. 지난 5월 미국의 싱크탱크 퓨(Pew) 리서치센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인 57%가 “미국은 자기 나라 문제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다른 나라의 문제는 해당국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는 2010년의 결과보다 10%포인트 이상 증가한 결과다. 이런 미국 국민의 속마음을 거칠지만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는 정치인이 바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다.


고립주의 정책 또는 원칙이란 일반적으로 자국의 이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 한해 각종 국제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하는 외교 노선을 의미한다.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소위 영예로운 고립(Glorious Isolation)의 깃발 아래 유럽 대륙 내 오스트리아·프랑스·프로이센·러시아 등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한 유럽 내부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 노선을 천명해 왔다. 미국 역시 건국 이후 한 세기 넘게 고립주의를 공식적인 외교 노선으로 천명했던 역사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신고립주의는 그동안 세계를 휩쓸며 멈출 것 같지 않던 세계화라는 큰 물결을 거슬러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 효율 극대화, 정치적 컨센서스, 지구촌 어디서나 즐기는 다양한 문화는 세계화의 약속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갈수록 확대되는 양극화, 빈부격차, 소득 불평등이라는 심각한 현실 앞에 그 매력을 급속히 상실해가고 있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화는 글로벌 공동체 의식을 떨어뜨렸고 선진국의 중산층조차도 이젠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 바빠 더는 강 건너 불을 끌 여유가 없다.


한국에도 신고립주의의 물결이 몰려올 가능성이 충분하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경직성은 신고립주의의 물결이 밀려들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외국노동자들에 대한 혐오발언을 보면 이미 신고립주의가 우리 사회에 상륙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수출이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는 경제 현실에서, 주변 강대국의 입장이 한반도의 정세를 휘두르는 외교 현실에서 우리가 고립주의를 선택하거나 추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딜레마는 여기서 깊어진다. 우리만 고립주의를 반대하고 국제주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주변 강국들의 고립주의적 입장을 변화시키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분명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마셜플랜이 대표적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휩쓸고 간 지 2년 뒤인 1947년 유럽은 여전히 폐허였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47년 6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후대에 거듭 인용되는 하버드대학 졸업식 연설을 한다. 그는 “미국은 세계 경제가 정상화되도록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안정도, 항구적 평화도 없다. 우리의 정책은 특정 국가가 아니라 기근·절망·혼돈을 막기 위한 것이다”고 역설했다. 마셜의 선언은 의도적으로 독일을 공업국가에서 농업국가로 변화시켜 국력을 약화시켜온 모건도 계획으로부터의 대전환이었다.


다음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에 군수물자 지원을 늘리기 위해 추진했던 무기대여법의 교훈을 들 수 있다. 30년대 미국 여론에서는 고립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나치의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미국 의회는 더 강한 중립법을 통과시켰을 뿐이었다. 이러한 국내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옆집 사람이 화재로 자기 집이 타들어가 우리에게 소방용 호스를 빌려 달라고 하는데 돈을 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영국 등 자유주의 진영에 대규모 군수물자를 좀 더 용이하게 지원할 수 있게 해 준 무기대여법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개방과 고립으로 국가의 명운이 갈린 동아시아의 역사다. 중국의 경우 명나라 시절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했다. 정화의 원정 이후로는 아예 나라의 문호를 걸어 잠근 고립주의를 취했다. 이후 청나라 역시 고립주의 정책을 유지했고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이라는 큰 굴욕을 당했다. 한반도에서도 조선을 비롯한 여러 왕조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곤 관계를 맺지 않았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과감히 문호를 개방하고 내적으로 축적된 역량과 서구의 선진과학기술을 융합해 단기간에 국력을 신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역사는 시대적 정신을 냉철하게 읽어내 마셜플랜과 무기대여법과 같이 상생하는 공동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리더십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지난 20여 년 동안 세상을 휩쓸었던 세계화의 물결이 그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고립주의라는 벽에 부닥쳤다. 소득과 부가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중산층이 사라져가는 양극화 사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와 ‘미국 우선주의’라는 슬로건으로 미국을 흔드는 트럼프 신드롬이 전하는 메시지다. 그러므로 이제 국가와 지역이 모두 번영하고 또 사회 내에서 소득불균형을 줄여나가는 전략과 정책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대안의 예로서 유라시아 개발전략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유라시아에는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그리고 러시아의 ‘유라시아 경제연합’ 등 여러 가지의 지역개발전략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들은 개별 국가적 관점에 국한되어 실현 가능성과 영향력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30년 열릴 북극항로를 통해 유라시아 각국의 개발전략을 하나로 연결하는 ‘거대한 원(Great Circle)’을 이루어내면 동북아 모든 국가에 커다란 기회가 될 것이다. 북극항로, 내륙항로, 남방항로를 하나로 연결해 에너지 및 무역의 물류비용을 크게 낮추어 유라시아 내의 시장 규모를 크게 키울 수 있다. 이기적 고립주의 대신 상생과 협력을 통해 21세기 동북아와 세계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신동력이 될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모두가 눈앞의 문제에 갇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때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사람, 민족, 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역사는 발전해왔다. 어쩌면 지금이 바로 한국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상의 변화를 이끌 기회인지도 모른다.


조정훈 전 세계은행 우즈베키스탄 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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