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 정조, 새로운 조선 위한 대반전 꿈꾸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6.06.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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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1 면

【총평】


?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는 국왕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붕당 간의 대립을 억누르고 정국의 안정 가져왔으나 집중된 권력을 제도화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순조 때부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도 가문이 정국을 이끌게 된 것이다.


?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후,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이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간 정권을 잡은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전주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당한 전주 풍남문에 세워졌다. 1891년에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착공해 6년 만에 준공했다. -사진가 권태균-

?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순조의 나이는 11세였다. 그래서 당시 왕실내의 최고 어른 이던 영조의 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 왕후는 장용영을 혁파하여 각 군영의 운영을 예전처럼 환원한 후 핵심 군영인 훈련도감을 장악했다.


? 순조는 이미 정조가 정한 노론 명문가 김조순의 딸을 비로 맞이 하였다. 이후 안동 김씨 가문이 정사에 깊이 간여하였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시파를 규합하여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직접 정사를 돌보게 함에 따라 정국은 다시 바뀌었다.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김조순은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정치의 실권을 국왕에게 돌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국왕의 후견자라는 명분으로 자기의 일족과 측근 세력을 비변사에 포진 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했다. 이로써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 헌종이 즉위하자 풍양 조씨 가문이 잠시 득세했다. 그러나 헌종의 비가 안동 김씨 집안에서 간택되었고, 뒤이어 철종의 비도 안동 김씨 집안에서 들이면서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가 오래 유지되었다.

순교자 윤지충을 기리는 전주 전동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천주교와 서양 문물이 소개되었는데, 이를 서학(西學)이라고 한다. 서학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종교, 윤리, 과학, 기술 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서학은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서적을 소개하면서 전래되었는데, 처음에는 종교가 아닌 서양 문물의 하나로 이해되었다.


? 주교교지는 정약용이 지은 천주교 교리 해설서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 한글로 되어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소개했고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다.


? 이익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북학파 실학자들은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이 많았다. 이익의 제자 중에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면서도 천주교는 배척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권철신, 이벽, 이가환, 정약종 등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으니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 신앙 생활이 더욱 활발해졌다.

정조 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데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사도세자 묘소인 융건릉 곁에 있다. 노론 벽파는 시신을 땅에 묻자마자 정조가 키워온 남인들을 공격했다. -사진가 권태균-

? 이승훈(1756~1801)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 신부를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신앙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19세기에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와 포교 활동 하면서 신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천주교 교세가 점차 확산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적 제사 의식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천주교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부정하고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베이징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을 금하고,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앤 윤지충을 사형에 처했다(신해박해).


? 정조는 천주교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으나, 순조 즉위 이후에는 노론 벽파가 집권하면서 시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정조 때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 세력이 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승훈이 정조 때 스스로 찾아가 영세 받기를 요청했던 북경 북천주당.

? 벽파는 정조의 탕평 정치에 반대하며 기존의 노론 집권당 우위를 강경하게 주장한 정파이며, 시파는 탕평 정치를 통해 왕건 강화를 추진한 정조의 정치 노선을 지지한 정파이다.


? 벽파는 남인 등의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1801년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신유박해). 이들은 천주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약용 등 남인 시파의 대부분을 정계에서 제거했다. 이승훈을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신유박해, 1801). 이후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 큰 탄압을 받았다. 곧이어 프랑스에 무력 동원을 요청하는 황사영의 편지가 발각되어 탄압이 더욱 강해졌다(황사영 백서 사건).

정조 상여 그림 정조 국장도감 가운데 있는데 임금의 상여를 뜻하는 대여(大輿)라고 표시돼 있다.

? 정부의 탄압에도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불안한 현실을 대신할 내세가 존재한다는 천주교 교리에 일부 백성이 공감하면서 천주교의 교파는 계속 이어졌다. 그 결과 조선 교구가 독립하고 서양인 신부가 몰래 들어와 포교했으며, 천주교는 한성과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핵심 키워드】


☞ 정순 왕후는 [장용영]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을 장악했다. 정조가 사망한 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이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간 정권을 잡은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천주교]와 서양 문물이 소개되었는데, 이를 [서학(西學])이라 한다.


? [주교교지]는 정약용이 지은 천주교 교리 해설서로 순 한글로 되어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했고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다.


?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베이징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을 금하고,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앤 윤지충을 사형에 처했다([신해박해]). 천주교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으나, 노론 벽파가 집권하면서 남인 등의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1801년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신유박해]).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 큰 탄압을 받았다. 곧이어 프랑스에 무력 동원을 요청하는 황사영의 편지가 발각되어 탄압이 더욱 강해졌다([황사영 백서 사건]). ☜


【예상 문제와 해설】


?1.?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난 시기의 사회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 요즘 사악한 무리들이 선대왕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천당과 지옥의 이야기로 백성을 현혹시키고 있다. 또한 저들이 높이는 것이 하나는 하느님, 하나는 조물주이고, 제 아비는 세 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니 엄금하도록 하라.


? '노'이다 '비'이다 하여 구분하는 것이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겠는가. 궁궐 노비와 관청 노비를 양민이 되도록 허락하고 승정원에 명을 내려 노비 문서를 모아 불태우도록 하라.


① 정감록 같은 비기와 도참설이 유행하였다.


② 부농층이 족보 매입을 통해 양반 행세를 하였다.


③ 붕당 정치의 변질로 몰락한 양반들이 늘어났다.


④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사화가 발생하였다.


⑤ 서얼들이 신분 차별에 반대하는 집단 상소를 올렸다.

* 2013년 4월 학력평가 8번

해설 : 정답 ④

④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사화가 발생한 것은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조선 중기이다.


2. 다음 주장을 한 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하늘에서 본 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각각 자기 나라 사람을 친밀하게 여기고 자기 임금을 높이며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나 한 가지이다. 대저 천지가 바뀜에 따라 인물이 많아지고, 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물(物)과 아(我)가 나타나고, 물아가 나타남에 딸 안과 밖이 구분된다.


①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였다.


② 우리 풍토에 맞는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하였다.


③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하였다.


④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⑤ 외국 자료를 참고한 역사서를 지어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혔다.

* 2009학년도 9월 모의평가 15번

해설 : 정답 ④

홍대용의 북경행은 북학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었다. 그는 화이(華夷)의 구분은 지역상의 구분일 뿐, 조선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오답 풀이>

①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한 인물로는 정약용이 있다.


3. 다음 주장을 펼친 사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 인간은 본래 신령스러움을 타고나기 때문에 사물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이며, 사물을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


? 하늘은 짐승에게 발톱과 뿔과 발굽과 이빨 등을 주었는데, 사람에게는 벌거숭이로 제 생명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어찌하여 하늘은 천한 짐승에게는 후하고 귀한 인간에게는 박하게 하였는가? 인간에게는 지혜로운 생각이 있으므로 기예(기술)를 익혀서 제 힘으로 살게 한 것이다.

[보기]

ㄱ. 충청도 출신의 호론 계열 학자이다.

ㄴ. 배다리를 설계하고 종두법을 실험하였다.

ㄷ. 노론 명문 출신으로 상공업의 진흥을 주장하였다.

ㄹ. 전통적인 화이관을 고수하면서 외래 문화를 배격하였다.

ㅁ.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현실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① ㄱ, ㄴ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ㄴ, ㅁ


⑤ ㄷ, ㅁ

* 2006학년도 수능 7번

해설 : 정답 ④

ㄴ. ㅁ. 정약용은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다. 또한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 배다리도 설계했다.

<오답 풀이>

ㄱ.ㄷ. 정약용은 남인 출신이다.

ㄹ. 정약용은 전통적 화이관을 극복하고자 했다.


?4. (가) 인물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절한 근거를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노비종모법이 시행되었다.

ㄴ. 부농층이 족보를 매입하였다.

ㄷ. 정부가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ㄹ. 천주교와 동학이 확산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14년 10월 학력평가 9번

* 24회 "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② 선조" 문제 5번

* 46회 "성공한 국왕들 ④ 세종" 문제 6번

* 49회 "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③ 정조" 문제 2번

?

해설 : 정답 ③

③ 양반의 수가 늘어난 이유는 공명첩과 납속책의 남발 때문이다. 향촌 사회에서 부를 축적한 부농이 족보를 매입하는 것 역시 이런 현상으로 이해하면 된다. 노비종모법이나 천죽와 동학의 확산이 시기적으로 같은 때이나 양반의 수가 늘어나는 현상과는 상관이 없다.

?

?


5. 밑줄 친 부분에 언급된 정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상황으로 옳은 것은?

당파의 습성이 고질화되어 손 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성상께서는 이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이쪽만을 등용하였고, 저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다시 저쪽만을 등용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선왕(先王) 초기까지도 당파가 여전히 싸움을 일삼아 엉킨 감정을 풀기 어려웠다. 이에 선왕이 탕평책의 정사를 행하여 후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조선왕조실록-


① 주화론과 주전론이 대립하면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② 노론과 소론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④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 2007학년도 6월 모의평가 17번

* 29회 “삼종(三宗)의 혈맥 ① 숙종 2” 편 문제 6번

* 39회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⑤ 영조” 편 문제 4번

해설 : 정답 ②

제시된 자료는 숙종에 의해 단행되었던 환국에 대한 설명이다.

② 숙종 때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다.

<오답 풀이>

⑤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격화된 것은 영조 때 나타난 현상이다.


6.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그는 “세상은 모든 사람의 것이니 일정한 주인이 없다. 누구를 섬기든지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또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설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가 일으킨 모반 사건에 연구되어 1천여 명이 처벌되는 대옥사가 진행되었다. 이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정치 세력은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상대 당 주요 인물을 응징하는 문제를 놓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그가 죽고 나서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모반설과 조작설이 맞서 왔다.


① 조정이 훈구와 사림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② 관료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③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다.


④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⑤ 관료들이 시파와 벽파로 갈라졌다.

* 2009학년도 9월 모의평가 17번

* 39회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⑤ 영조” 편 문제 5번

해설 : 정답 ③

③ 정여립 모반 사건을 처리했던 서인이 선조에 의해 물러나게 되자 동인들은 서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놓고 온건파(남인)과 급진파(북인)로 나뉘게 되었다.

<오답 풀이>

⑤ 시파와 벽파는 조선 영조 때 장헌세자(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賜死)를 둘러싸고 분열된 파당이다.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던 시파는 대부분 남인 계통이었으며, 세자를 공격해 합리화하려고 했던 벽파는 대부분 노론이었다. 장헌세자에 대한 비판과 동정도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명분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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