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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21> 운하의 도시 브뤼헤에서 벨기에 맥주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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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베네치아, 브뤼헤의 서정적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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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한 명일 때와 한 명도 없을 때의 차이는 무한대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 ‘여행’과 ‘술’이란 단어를 붙이면 더욱 공감이 간다. 여행 중, 술친구가 있을 때와 한 명도 없을 때의 차이는 무한대다. 여행지가 ‘맥주 박람회장’ 같은 나라, 벨기에라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무수히 많은 맥주를 친구 삼아 여행하거나. 펍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술친구를 만나거나.

마르크트 광장의 노천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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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비행기 창 너머로 아득해지는 리스본을 바라보며 심장이 쫄깃쫄깃했다. 몇 시간 뒤면 브뤼셀 공항에 도착할 터였다. 목적지는 벨기에 북서부의 브뤼헤(Bruges)였다. ‘벨기에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브뤼헤는 아담한 수로가 구시가지를 감싸 흐르고, 수십 개의 작은 다리가 놓인 운하 도시다. 중세 시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구시가지 중앙의 마르크트(Markt) 광장에는 계단 모양의 지붕이 특징인 플랑드르 양식의 길드 하우스(Guild House)가 빼곡하고, 가운데는 벨포트(Belfort) 종탑이 우뚝 서 있다. 매시 정각마다 맑고 고운 종소리가 광장에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굳이, 브뤼셀에서 기차로 1시간을 더 달려 브뤼헤에 간 이유는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벨기에 맥주를 즐기고 싶어서였다. 잔잔히 흐르는 운하를 바라보며 화이트 비어(White beer)를 음미한다면, 포르투갈 출장으로 켜켜이 쌓인 여독이 싹 풀릴 듯 했다. 벨기에에선 밀(Wheat) 맥주를 화이트 비어라 부르는데, 고수(Coriander)의 씨앗과 큐라소(curaçao) 섬에서 자란 오렌지 껍질을 넣어 상큼한 과일 향과 경쾌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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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맥주 전용 잔들.

오래된 펍에서 마시는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도 각별할 것 같았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6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직접 만드는 맥주에만 허락하는 이름으로, 아헬(Achel), 쉬메이(Chimay), 오르발(Orval)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람빅(Lambic), 세종(Saison), 비에르 드 샹파뉴(Biere de Champagne)를 포함한 벨기에 맥주 종류는 크게 12개, 세분화하면 60개에 이른다. 맥주 브랜드만 무려 500개가 넘는다. 그 종류만큼 잔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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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헤의 흔한 맥주 전문 보틀숍 풍경.

소문대로 브뤼헤는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건축박물관 같은 거리에는 노천 레스토랑, 펍, 아기자기한 상점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내 눈길이 머문 곳은 맥주 상점이었다. 다양한 병맥주를 벽면 가득 채운 맥주 전문 보틀숍(Bottle shop)이 세집 건너 한집 꼴로 있는 게 아닌가. 맥주를 사서 바로 마실 수 있는 곳도 많았다. “이 맥주들 좀 봐. 우리 뭐부터 마실까?” 라고 말을 걸 친구가 없어 못내 아쉬웠다. 마셔보고 싶은 맥주가 넘쳐나는데, 나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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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맥주는 좁고 길쭉한 플투트 잔에 따라 마셔야 풍미가 살아난다.

맥주를 친구 삼자는 마음으로 비어 뮤지엄(Beer Musuem)이란 가게에 들어섰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채운 맥주 장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황홀한 나머지 결정 장애에 봉착한 나는 주인장 추천을 받아 겨우 오머(Omer) 한 병을 택했다. 뒤뜰로 나오니 햇살 아래 노부부가 사이좋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옆 테이블에 앉아 찰랑찰랑 맥주를 따랐다. 담벼락 너머로는 벨포트 종탑의 뒤통수가 보였다. 몇 모금 들이켰더니 종탑의 뒷모습도 아름다워 보였다. 살짝 몽롱한 기분으로 맥주를 홀짝이며 가만히 풍경을 흡수했다.

 “아름답지 않아요? 화창한 날 마시는 벨기에 맥주라니. 알코올 도수도 8도가 넘어요?”

옆자리의 아저씨가 영국식 악센트로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내 맥주는 알코올 8%였다. 건지 섬(Guernsey Island)에서 왔다는 부부는 브뤼헤에서 보낸 3일이 너무 달콤했다며, 그중 제일은 매일 다른 맥주를 골라 마시는 재미라고 했다. 국경과 나이를 초월해 취향이 비슷한 술친구를 만난 기쁨에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푸른 하늘 아래 맥주잔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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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 브뤼흐스 비르트예(Brug`s Beertje)에 갈 땐 흰 곰이 맥주를 안고 있는 간판을 찾으면 된다.

저녁 무렵엔 ‘브뤼헤의 작은 곰’이란 뜻의 브뤼흐스 비르트예(Brug's Beertje)로 향했다. 브뤼헤의 터줏대감 같은 펍으로 맥주 리스트만 300가지가 넘는다.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4인용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점점 손님이 늘었다. 우르르 들어온 남자들이 옆자리에 앉으며 의자를 빌려달라 길래, 아예 테이블의 반을 내줬다. 아이들이 런던에서 같은 유치원을 다닌다는 자칭 젠틀맨 6인방은 남자들만의 여행 축하주로 샴페인 맥주를 마실 기대에 들떠 있었다.

내게도 자리를 내줘 고맙다며 한 잔을 권했다. 못 이기는 척 받아든 잔은 데우스(Deus)였다. 그때만 해도 데우스가 샴페인 맥주 중 최상급인지 전혀 몰랐다. 샴페인 맥주(Biere de Champagne)는 맥주 효모로 발효를 거친 후 샴페인 병에 넣어 진짜 샴페인을 만드는 프랑스 상파뉴(Champane) 지방의 동굴에서 숙성을 시킨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저 진한 과일 향에 코끝이 먼저 반응을 했고, 마셔보니 꿀맛이었다. 마실수록 복합적인 풍미가 감돌았다. 그날 나는 샴페인 맥주의 우아한 맛에 눈을 떴다. 우연히, 여행과 맥주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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