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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아마존에 밀린 BBC, 스트리밍서비스로 반격 태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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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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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가 ITV와 공동으로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를 계획 중이란 소문이 떠돈다. 넷플릭스와 아마존에 속절없이 시청자를 빼앗기는 데 질린 영국 지상파 방송이 마지막 위엄을 지키기 위해 결국 ‘영국판’ 넷플릭스를 만들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름도 요망하게 ‘브릿플릭스’가 될지 모른단다.

소문은 지난해부터 무성했다. BBC는 영국 넷플릭스에 내용 공급을 일부 중단했고, 해외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를 멈추는 등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BBC 사장 토니 홀은 지난해 9월 미국에서 새로운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운을 떼기도 했다. 그러나 실체는 모호했다. BBC와 ITV는 지금까지 ‘추측성 기사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원칙적으로 대응해 왔다.

소문의 실체는 뜻밖의 장소에서 드러났다. 바로 최근 영국 정부가 발표한 BBC 면허 갱신을 위한 백서다. BBC는 올해 말로 만료되는 방송 면허를 갱신하기 위해 보수당 정부와 힘겨루기 중이다. 보수당 정부는 BBC 지배구조와 재정에 대한 감사 권한 강화, 그리고 텔레비전 수신료에 대한 압박이라는 강성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BBC는 정부의 간섭은 피하면서 재원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5월 12일 발행한 백서는 이런 대결의 소산이다.

문제의 백서에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BBC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재원 모형을 마련할 방법으로 수신료와 구독료의 결합 모형을 개발해도 좋다는 것이다. 향후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업 주체를 만들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사업 모형은 이미 정해진 셈이다. 넷플릭스나 아마존 프라임같이 월정액을 받는 구독료 모형이다.

영국 지상파 방송이 인터넷 진출을 시도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BBC의 상업적 자회사인 월드와이드는 ITV, 채널4와 함께 인터넷 방송 서비스를 계획했다. 일명 ‘캥거루 프로젝트’라 불렸던 일종의 주문형 비디오 사업이다. 그러나 당시 규제 당국은 지상파 방송사가 연합해 인터넷에 진출하면 신규 사업자의 기회를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넷플릭스와 아마존이 등장한 지금은 사정이 변해도 한참 변했다. 국내 신규 인터넷 사업자의 경쟁력 보호가 문제가 아니라 영국 방송시장이 미국의 인터넷 서비스로 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품질이라면 미국에 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영국 방송계로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통적으로 유럽은 규제적 방법으로 방송시장을 통제했다. 최근 유럽연합(EU)은 이 전통적 방법으로 인터넷 비디오 서비스도 규제하겠다고 나섰다. ‘시청각 매체 역무지침’을 이용해 유럽 넷플릭스와 아마존이 프로그램 목록의 20% 이상을 유럽에서 제작한 내용으로 채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스트리밍 플랫폼’에 편성을 강요한다고 해서 그게 시청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자국 제작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 수 없다. 넷플릭스와 아마존은 구색 갖추기로 유럽 프로그램을 구입해 최저할당 분량만 채우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방송계는 결국 공세적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독자적인 스트리밍 플랫폼에 자체 내용을 담아 경쟁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자국 시청자를 보호하는 데 멈추지 않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