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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동인도회사 동전 흔한 ‘아시아 지배 기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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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15면

대항해 시대 유럽이 보석 중의 보석으로 여겼던 스리랑카의 골에 축조된 성벽. 요새와 인도양의 푸른 바닷빛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사진 주강현]

사내는 옛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동전 셋을 내밀었다. “하나에 10달러씩 30달러 주세요.” “여기서는 흔하디 흔한 건데 10달러에 3개라면 사겠다.” 흥정 끝에 수백 년 된 동전 3개를 10달러에 ‘득템’했다. 스리랑카의 옛 식민도시 골(Galle)에서 일상적으로 외국인들이 경험하는 풍경이다. 땅에서 나오는 동인도회사 동전을 팔러 다닐 정도로 골은 네덜란드의 도시였다.


스리랑카로 떠나기 전, 로디 엠브레흐츠 주한 네덜란드 대사와 관저에서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다. “스리랑카를 가신다니 반드시 골에 들러 주세요.” 네덜란드가 번성을 구가하던 18세기에 아시아에서 가장 잘나가던 식민도시였기에 대사는 짐짓 자부심을 섞어가며 강권했다. 그만큼 스리랑카 남서쪽 해안에 있는 골은 네덜란드가 세운 아시아 거점 중의 거점이었다.


성경에 골은 솔로몬왕이 상아와 원숭이, 공작을 얻은 곳으로 묘사돼 있다. 아시아의 가장 오랜 무역기지 중의 으뜸이었다. 아랍인들은 칼랍(Kalab)이라 불렀다.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중간 거점으로 주목받았다.

1 포르투갈인이 스리랑카 골에 세운 성벽. 나중에 네덜란드에 점령됐다. 2 ‘향료의 섬’이기도 했던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향료들. 스리랑카는 계피의 세계적 주산지다.

14세기엔 에티오피아인 500명 거느려골의 해양사적 중요성을 잘 말해주는 기록으로 모로코의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꼽을 수 있다. 바투타는 북인도 델리를 거쳐 인도 서쪽 해안을 타고 내려와 오늘날의 몰디브로 갔다. 몰디브에서 디나와르(오늘날의 스리랑카 콜롬보)를 거쳐 골에도 들렀다. 당시 디나와르는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해변의 큰 도시였다. 힌두교 대사원에는 1000여 명의 브라만과 500여 명의 인도 여인들이 춤을 추며 봉헌하고 있었다. 북부 인도에서 내려온 인도인이 당시 항구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바투타가 골을 찾았을 때는 1344년. 당시 스리랑카 남쪽의 해상 통치자는 잘라스티였는데, 그 아래 500여 명의 에티오피아인을 거느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동부 아프리카인이 인도양을 건너와 스리랑카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종족의 교류와 거주에서 이른바 현대사회의 비자 체제와 국민국가 시스템보다 고대·중세의 개방성이 훨씬 돋보인다. 바투타는 골에서 북상하여 스리랑카해협을 거쳐 벵골만으로 올라갔다가 오늘날의 수마트라 반다아체를 거쳐 중국으로 향했다.


정화함대가 골을 방문한 역사적 사건도 벌어졌다. 금석문에 의하면 정화는 불치사에 보관돼 있는 부처님 진신 치아를 얻겠다는 생각으로 2차 원정 때 들른 것으로 나타난다. 1411년의 일이다. 여기까지는 이슬람교도와 중국인의 방문 기록이다.


그 이후로는 유럽인의 새로운 역사와 기록이 시작된다. 어쩌면 그 이후의 역사는 오로지 유럽인에 의한, 유럽인을 위한 역사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항해 시대 유럽의 입장에서 스리랑카는 그야말로 보석 중의 보석이었고, 해상을 통한 아시아 지배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뛰어난 스리랑카 역사학자 실바는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순차적 지배가 남긴 흔적과 그 비극적 상처조차 오늘날의 스리랑카를 만들어낸 뿌리”라고 정리해준다.


일찍이 1498년 바스코 다가마는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 남부의 가장 번성하던 항구 캘리컷에 당도한다. 이후 오늘날의 뭄바이 남쪽 고아에 포르투갈 최대 식민도시가 만들어졌음은 교과서적 상식이다. 그런데 고아는 아프리카와 소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으로는 유리했으나 믈라카를 거쳐 중국과 연결하기에는 불편했다. 결국 인도 남쪽의 최대 식민도시 거점으로 주목한 곳이 스리랑카 골이었다.


1505년 포르투갈 알메이다가 이끄는 선단이 골에 당도하여 ‘검은 성’이란 이름의 자르트(Zwart) 성을 만들었다. 오늘날 네덜란드 창고거리 남쪽의 비교적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봤다. 암반으로 된 절벽 위에 검은 성을 쌓고 방어막을 설치했다. 식민 저항자들을 감금했을 감옥도 성채 정상에 서 있다. 성은 지저분하게 방치되어 있으나 그 원형은 그런대로 보존됐다. 대포를 걸쳤던 성벽에서 굽어보니 험악한 요새와 인도양의 푸른 바다 빛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저 바다를 거쳐서 수많은 제국의 선단이 몰려왔을 것이다. 움푹 들어간 만은 무역기지로 안성맞춤이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요트 선착장과 선원학교로 이용될 뿐이나, 옛날에는 모래사장이 안전하게 배를 받아들이는 천혜의 항구였다.


인도양을 가로질러 동아시아로 무역로를 개척하던 후발주자 네덜란드는 스파이를 보내 골의 정황을 탐색했다. 포르투갈 성채가 생각보다 허술하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공격하여 1640년에 접수한다. 포르투갈이 뿌린 토대에 네덜란드 군사 건축술이 가미되어 당시로서는 아시아 최대의 식민요새가 만들어졌다. 황금빛 인도양이 굽어 보이는 절벽과 모래사장이 연이어지는 아름다운 골은 둘레 3㎞의 탄탄한 성벽이 정밀하게 축조된 요충지로 거듭난다.


험악한 요새, 인도양의 푸른 바다 묘한 대조‘스타 요새’라 부르는 북서쪽의 성벽으로 걸어갔다. 18.2m의 엄청난 깊이의 해자가 있다. 본디 감옥으로 쓰였다. 성벽 바깥은 아라비아해의 거침없는 파도가 성벽을 때린다. 성벽의 그로테스크한 위력조차 곱게 석양이 지는 아라비아해의 낙조에 파묻혀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골 시가로 내려가니 성벽에는 VOC 마크가 각인돼 있다. 법원이 만들어지고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창고도 들어섰다. 무슬림 모스크와 불교 사찰도 들어서서 이곳이 온갖 상품의 거래뿐 아니라 동서 문명교류의 매개처임을 알려준다.


근대적 시설들도 들어선다. 오늘날 헤리티지 본부와 레스토랑 등으로 활용되는 웅장한 병원·시계탑·등대·식민청사·창고 등이다. 질서정연한 도로가 들어서고 거류민단과 무역상을 위한 개인 주택도 세워진다. VOC는 나중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나 수라바야 등에도 식민도시를 세우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로는 아시아에서 골만 한 곳이 없었을 터.


수퍼마켓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향료 칸이 별도로 있다. 계피·후추·정향 등 다양한 향료도 눈에 띄었다. 스리랑카는 역시 ‘보석의 섬’ 이전에 ‘향료의 섬’이다. 골의 경제적 가치는 계피무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계피농업 역시 일찍이 포르투갈이 시작했으나 1659년 VOC가 독점법을 만들면서 정글에서 자라던 계피나무를 플랜테이션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개인이 사사로이 수확 재배하는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는 혹독한 법으로 계피를 독점한다. 계피나무마다 스리랑카인의 한숨이 배어 있는 셈이다.


수퍼마켓에서 산 계피를 씹어보았다. 껍질이 연하다. 우리가 한약방에서 자주 보던 베트남 산의 두터운 수피가 아니다. 색깔도 고운 것이 양질의 계피다. 스리랑카는 세계 계피 생산량의 80~90%를 차지한다. 인도양은 계피 생산에 적당한 기후대다. 세이셸 군도, 마다가스카르에서도 계피 플랜테이션을 하고 있다. 기원전 4000년 전에 이미 이집트에서 계피를 방부제로 썼다. 인도양을 건너온 수입품이었을 것이다. 『동의보감』에 계피의 뜨거운 효능이 속을 따스하게 하여 혈맥을 잘 통하게 한다고 쓰인 것을 보면, 계피는 수입 향료로서 조선 사회에서도 귀하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 지배 후 골에서 콜롬보로 거점 옮겨가계피는 보통 12년 정도 자라면 수확한다. 5월과 8월 사이다. 4월까지 서쪽 해안은 거친 파도로 인해 수확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1706년, 네덜란드는 강을 이용한 내부 운하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해 통계를 보니, 거주하고 있는 관료·장인·선원·군인 중에서 단연 군인과 선원이 압도적이었다. 무려 1841명이 성내에 살았는데 당시 기준으로 높은 인구밀도다. 네덜란드인은 천하의 상인이었다. 쌀과 소금, 벽돌 등 돈 되는 것이라면 다 중개무역을 했다.


제국의 번성과 영화는 언제나 부침을 거듭하기 마련. 1796년 영국이 골을 빼앗았다. 영국은 골을 해양 지배의 허브로 삼았다. 그러나 영국의 욕망은 이전 지배자들의 욕망과, 그리고 이를 풀어내는 방식이 많이 달랐다. 영국은 더 이상 군사형 식민요새로는 근본적 지배가 불가함을 깨달았다. 식민거점은 북상하여 콜롬보로 옮아갔다. 영국은 ‘브리티시 실론’을 ‘크라운 식민지’로 창조하기 위해 도로·학교·병원·항구 등 신도시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영국의 지배가 골에서 콜롬보로, 거점 도시만을 옮긴 것이 아니다. 계피 못지않게 홍차가 주요 수출품으로 등장했다. 중국에서 사들이는 차 때문에 많은 은을 쓰고 있던 영국 입장에서는 ‘실론티’를 개발함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불교의 성지인 캔디산 중턱의 차 박물관을 찾았다. 차의 재배부터 판매까지 모든 공정이 전시돼 있다. 스리랑카는 이전의 모든 보물을 제치고 실론티의 본향으로 전혀 새롭게 태어났다.


귀국길에 실론티를 한 움큼 들고 왔다. 생산지에서 바로 갖고 와서 그런가. 차맛이 다르고 뛰어나다. 역시 실론티다. 그런데 품격 높은 실론티가 완성되기까지, 차맛을 내기 위해 평생을 걸쳐 그리고 대를 이은 영국인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제국의 이름으로 나선 무역상인, 플랜테이션의 지배자들이지만 ‘글로벌 콘텐트’ 하나는 남겨두었다. 이름하여 세계인이 선호하는 실론티.


식민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콜롬보 항구에서 연신 부대 자루를 옮기는 원주민이 등장한다. 그 무거운 부대 안에는 계피와 실론티가 담겨 있을 터. 그들은 그렇게 1948년 독립될 때까지 전권을 거머쥐고 스리랑카의 부를 빨아들였다. 계피와 차, 골과 콜롬보는 대항해 시대의 상징으로 남아서 지금도 유전되는 중이다.


1988년 골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식민과 제국의 바다는 역사의 뒤안길에 넘겨주고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필수적으로 들르는 관광지로만 남았다. 탐사대 역시 그 관광객 중의 하나로 섞여 해양실크로드 문명의 궤적을 탐색하는 중이다.


다음에는 남인도(첸나이·코친)편이 소개됩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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