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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49)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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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1 면

? 정조 즉위 무렵 조정은 노론 일색이었다. 노론 일당독재 체제를 다당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조선이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치개혁이었다. 소론은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자 이에 고무되어 공세에 나섰다. 이에 대해 정조는 뜻밖에도 크게 화를 내며 국청 설치를 명했다. 소론이 성급한 공세를 펼친 것이기도 했다. 겨우 즉위에는 성공했지만 정조의 권력은 아직 노론에 맞서기에는 크게 미약했다. 게다가 정조는 물론 소론도 사도세자 문제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사도세자 비극의 정점에 영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 정조는 영조가 죽기 한 달 전인 영조 52년(1776) 2월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임오년 처분에 대해 신(臣:정조)은 사시(四時)처럼 믿고 금석같이 지킬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자신이 즉위해도 사도세자 문제로 정치보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정조는 국문 끝에 시골 유생 이일화와 이덕사·조재한 등 소론 인사들을 사형시켰다. 귀양 등의 처분으로 살려두었다가 훗날 노론 견제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패를 스스로 버린 셈이었다. 이것은 정조의 뜻이라기보다는 정조 초반의 실세였던 홍국영의 작품이었다. 홍국영은 노론 집안 출신이었으나 영조 말년 세손궁의 사서(司書)로서 노론 벽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워 세손을 보호했다.


? 조선을 정상적인 왕조국가로 만드는 게 정조의 목적이었다면 홍국영의 목적은 노론 정권의 영수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홍국영은 소론이나 남인들이 정조에게 접근하는 것을 극력 차단했고, 조재한 등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심지어 홍국영은 정조 2년(1778)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으로 삼아 그 소생에게 정조의 후사를 잇게 하려 했다. 원빈이 이듬해 사망하자 홍국영은 장례식 때 은언군의 아들 이담(李湛)을 국왕을 대신해 전(奠)을 올리는 대전관(代奠官)으로 삼았다. 홍국영은 이담을 완풍군(完豊君)으로 일컬으며 ‘내 생질’이라고까지 말했는데, 완풍군은 전주 이씨의 적손이자 풍산 홍씨의 외손으로서 정조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비로소 정조는 홍국영이 자신의 왕국을 꿈꾸는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조는 재위 3년(1779) 9월 홍국영이 자진해서 벼슬을 내놓는 형식으로 전격적으로 쫓아냈다. 결국 홍국영은 정조 5년(1781) 4월 불과 서른넷의 나이로 강릉에서 죽고 말았다.


?? 홍국영 실각 후 정조는 비로소 정국을 자의로 이끌 수 있었다. 이때 정조가 주목한 정치세력이 남인들이었다. 남인들 중 영남 지역의 남인들은 이인좌의 난에 대거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과거 응시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이후 남인은 당의 기능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으나 성호 이익(李瀷)을 사사(師事)한 근기(近畿:경기 부근) 지역의 남인들은 당파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계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드디어 재위 12년(1788) 2월 정조는 어필(御筆)로 직접 임명장을 써서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에 특배(特配)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정조는 승지들과 이조판서를 파직시키며 채제공의 정승 임명을 강행했다.


영남 남인들은 채제공의 정승 임명에 고무되었다. 안동 유생 이진동(李鎭東)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은 상소문과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 갖고 상경했는데 무신창의록은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사대부 모두가 이인좌에게 동조한 것이 아니라 반군에 맞서 싸운 사대부도 많다면서 그 공적을 기록한 책자였다. 예조에서는 정조에게 무신창의록을 읽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정조는 밤 새워 다 읽은 다음 채제공에게 무신창의록 간행과 대상자들의 포상을 명했다. 그러나 노론이 책자 간행을 거부하고 승지와 사관들마저 명을 받기를 거부하자 정조는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분노했다. ? 정조는 재위 16년(1792) 3월 각신(閣臣:규장각 신하) 이만수(李晩秀)를 영남으로 보내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별시(別試)를 치르게 했다. 이인좌의 난 이후 무려 65년 만에 영남 남인들이 복권되는 과거였다. 별시장(別試場)에 입장한 유생이 7200여 명, 시권(試券:답안지)이 5000여 장, 구경꾼까지 합쳐 1만여 명이 훨씬 넘는 대인파가 모여 ‘영남에 사대부가 만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는 이만수가 가져온 시권을 직접 채점해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을 합격시켰다. 그사이 남인들은 한두 명씩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서 세를 만들어 나갔다. 드디어 정조는 재위 19년(1795) 봄 채제공을 좌의정, 이가환을 공조판서, 정약용을 우부승지로 삼는 등 남인들을 대거 요직에 임명했다. 정약용이 ‘정헌 이가환 묘지명’에서 “이에 안팎의 분위기가 흡족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모두 진출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라고 서술한 것처럼 노론 일색의 조정 역학구도에 변화 조짐이 일었다.


? 신분제의 질곡에 신음한 계급은 노비만이 아니었다. 서자(庶子)들도 마찬가지였다. 양반가에서 태어난 서자들은 적자(嫡子) 못지않은 학문이 있었음에도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차별에 시달렸다. 이런 신분제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신분제는 조선이 미래로 가는 것을 막는 암적 존재였다.


? 이미 양반 사대부들의 학문 독점은 붕괴됐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백탑파(白塔派)다. 현재의 서울 종로 2, 3가 일대는 원각사가 있었기 때문에 대사동(大寺洞) 또는 큰절골로 불렸다. 원각사의 ‘흰색 10층 석탑(白塔)’ 부근에 살던 지식인 집단이 백탑파였다.? 백탑 부근에 박지원·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 현실에서 소외된 이런 선비들이 모여서 실학의 한 주류인 북학파, 즉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인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를 형성했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은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집권 노론은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으로 청나라를 부인했지만 현실에서 소외된 지식인 집단은 그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 결과 북학(北學)을 주창한 것이었다.


? 이덕무와 박제가는 정조 2년(1778) 3월 상사(上使) 채제공, 서장관 심염조(沈念祖)와의 친분으로 처음 북경에 갔다. 이보다 앞서 홍대용은 북경 기행문인 연기(燕記)에서 청나라의 발전상을 묘사해 이덕무·박제가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덕무도 북경에 다녀와 입연기라는 기행문을 써 청나라가 이미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이 뒤따라야 할 선진국이라고 주장했다. 박제가는 기행문 대신 북학의(北學議)를 썼는데 ‘북학(北學)’의 원래 뜻은 중국 남부의 지식인 진량이 북쪽 중국에서 유학을 배운다는 뜻이지만 박제가는 청나라를 인정하고 배우자는 뜻으로 사용했다. 이들을 북학파라고 부르는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겉으로는 매년 사신을 보내며 사대하면서도 속으로는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이중적 처신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청나라를 배우자고 주장하는 것은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 정조가 고대 은(殷)나라에서 성 쌓다가 발탁된 부열(傅說)과 주(周)나라 때 낚시질하다 발탁된 여상(呂尙)에 대해 자주 언급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려는 구상을 내비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위 3년(1779)에는 도승지 홍국영의 건의를 받아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네 명의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했다. 교서관(校書館)의 정원 네 자리를 규장각으로 돌려서 임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발탁된 4명의 검서관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 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했다. 그간 신분제의 질곡에 얽매어 있던 머릿속의 지식이 규장각 검서관이란 날개를 달자 하늘 높이 비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당초 이들의 문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덕무·박제가 등의 문체는 패관소품이지만 ‘처지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등용했다는 뜻이다. 능력은 있지만 현실에서 소외된 이들을 발탁하는 것이 정조의 남다른 인재등용관이었다. ? 이렇게 등용된 인재들은 사회의 변두리에서 시대의 한복판으로 뛰어오르며 북학을 현실의 이론으로 만들었다. 사회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층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정조는 신분제의 완화 내지는 철폐가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정조는 소외된 인물들과 손잡고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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