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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 죽일 정도면 사람에게 나쁠 텐데…병원도 몰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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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결국 내가 내 딸을 죽인 것 같아요.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기에 가습기 살균제까지 쓰면서 유난을 떨었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죽은 거잖아요.”

17년간 무지했던 병원·전문가
초기에 알레르기·간질성질환 진단

조재은(61·여)씨는 최근 중앙일보 취재팀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2008년 난생처음으로 가습기 살균제 세퓨를 구입한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말했다. 조씨가 가습기를 사용한 건 둘째 아이를 임신한 딸의 호흡기 건강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습기를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 살균제를 사용한 조씨의 배려는 결국 ‘원인불명의 간질성 폐질환’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단순한 감기인 줄 알았어요.”

조씨의 딸인 최지원(2010년 사망 당시 34세)씨의 증상은 2010년 3월 고열을 동반한 마른 기침으로 시작됐다. 당시 지원씨는 열이 40도까지 올라가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감기니까 괜찮아질 것”이라고 엄마를 안심시켰고, 간호학과를 졸업해 전문가 수준의 의료지식을 갖춘 딸이었기에 조씨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실제 병원에서도 단순 알레르기성 질환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병원에 다녀온 이후 몸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당시 광고에서도 인체에 99.9% 안전하다고 광고했는데 사람 죽이는 유독물질이 들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최씨의 기침이 심해질수록 조씨는 가습기 사용 시간을 늘렸고, 가습기 살균제를 더 자주 넣었다고 한다. 조씨는 “목이 건조하다며 하루 종일 기침하는 지원이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가습기를 틀어주고 주기적으로 살균제를 넣어주는 것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기침을 달고 지내던 최씨는 결국 4월 중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한 달 만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기계 없이는 숨조차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병원에서는 이번엔 ‘간질성 폐질환’이라고 진단했다. 불과 한 달 만에 병명이 바뀐 것이다. 조씨는 “왜 병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치료할 방법도 없다고 하니까 엄마로서 정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입원한 지 40여 일 만인 6월 7일 폐 전체가 딱딱하게 굳어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조씨는 “6년이 지났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지내고 있다”며 “사람이 아무런 잘못 없이 죽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가습기 피해자 가족인 박지숙(36·여)씨는 딸 장서윤(8)양이 생후 6개월 때 처음으로 가습기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폐렴 증세로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뒤 “환절기에는 습도 조절을 위해 집 안에 가습기를 설치하는 게 좋다”는 담당 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딸의 피부와 호흡기에 직접 닿는다는 생각에 박씨는 빼먹지 않고 가습기 살균제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습기를 오랜 시간 틀어놓고 꼼꼼하게 살균제를 사용할수록 서윤양의 증상은 점차 악화됐다.

딸의 건강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박씨는 곧바로 서윤양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시켰다. 이후 꾸준한 치료를 통해 폐질환이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미 폐 기능의 80% 이상을 잃은 뒤였다.

박씨는 “폐질환의 후유증으로 서윤이는 지금도 달리기 같은 격한 운동을 시작하면 곧바로 숨이 차올라 헉헉거린다”며 “살균제가 세균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독성이면 당연히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보건 분야 전문가들은 “가습기 살균제가 출시된 이후 17년간 한 번도 살균제의 위험성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었다”며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무지했던 탓에 수백 명의 피해자를 구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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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보건전문가들이 가습기 자체의 위험인 가습기 폐질환을 경고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17년간 가습기 살균제 위험성을 의심한 적도 없다”며 “병원 등 의료기관이 유해성을 모른 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환자들에게 권장해 사태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진상 규명, 사망자와 생존 피해자 및 가족 모두에게 충분한 위로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며 “임산부와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죽게 한 옥시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에도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 접수된 피해자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만큼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치료하는 국가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채윤경·정진우·윤정민·송승환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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