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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망 후 무르익은 타이완의 좌익 사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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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28면

1 중공이 개입하기 전까지, 타이완의 좌익 사조는 낭만적 사회주의 수준이었다. 1945년 11월, 타이완학련 발대식.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다. 이유는 단 하나, 희망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상이 조용할 줄 알았다. 희망은 욕망 앞에 맥을 못 췄다. 푸른 하늘이 먹구름으로 변했다. 타이완(臺灣)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사조가 범람하고 의식 형태가 팽팽히 대치했다.


일본 패망 후, 타이완은 50년 만에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 감옥에 있던 항일 청년들이 풀려났다. 대륙을 떠돌던 타이완 출신 항일 인사들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 계층은 정서가 비슷했다.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궈슈충(郭琇琮·곽수종)이 타이완학생연맹(臺灣學聯)을 조직하자 자발적으로 호응했다.


연합국 태평양지구 사령관 맥아더가 타이완을 연합국 성원인 중화민국이 접수한다고 선언했다. 중국전구(戰區) 최고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육군 상장 천이(陳儀·진의)를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타이완학련은 “조국을 영접하자”며 선전 활동에 나섰다.

2 중국 국적 회복에 환호하는 시민들, 1945년 10월 26일 오후, 타이베이. [사진 제공 김명호]

1945년 10월 25일, 타이베이(臺北) 공회당(현 중산당)에서 일본 투항의식이 열렸다. 천이가 중국 정부를 대표해 정식으로 선언했다. “오늘을 기해 타이완과 펑후(澎湖)열도는 중국이다.”


대만학련은 들떴다. 이튿날, 성대한 경축 시위를 주재했다. 수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국기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와 “민족의 자립과 자강” “봉건관념 타파” “동맹군 만세” “미군 만세” “국군 만세” 등 온갖 표어가 온 시내를 뒤덮었다. 가가호호, 등불을 밝히고 조상의 영전에 항전 승리와 국적 회복을 고했다.


행정장관공서(行政長官公署)는 전 성의 군사와 입법·사법·행정권을 장악했다. 국민정부는 타이완인을 믿지 않았다. “도처에 일본 글자가 난무하고, 하는 짓들이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분이 안 간다. 모국어도 잊은 지 오래다. 작가라는 사람들이 우선 일본어로 써놓고 모국어로 변역하는 꼴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며 무시했다. “사람 값에 못 든다. 일본의 노예들이다.”


타이완인들은 대륙에서 나온 사람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르며 경원시했다.


행정장관공서는 18명의 처장과 부 처장 중 17명을 외성인으로 채웠다. 타이완 출신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시장이나 현장도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열세 명은 깡그리 외성인이었다. 자치와 참정의 기회가 왔다고 환호하던 타이완인들은 실망했다. 국민당과 미국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연달아 사건이 터졌다.


46년 7월 19일,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일본 경찰과 타이완 화교 사이에 유혈극이 벌어졌다. 화교들의 피해가 컸다. 다섯 명이 사망하고 열여덟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군 헌병이 진압에 나섰다. 화교 36명을 체포했다. 미 군사법정은 이들을 해외로 추방했다.타이완인들은 격앙했다. 미군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국민당과 난징(南京)의 국민정부를 향해 ‘이거나 먹으라’며 팔뚝질을 해댔다. 타이완학련은 지식청년들을 중심으로 반미 시위를 벌였다. 호응이 약하고 구호도 싱거웠다.


중공은 타이완을 주목했다. 조직과 선전의 귀재들이 머리를 맞댔다. 상하이국(上海局)산하에 “타이완 공작위원회”를 신설했다. 타이완 출신 당원들을 타이완의 중요 도시에 파견했다. “지하 공작을 통해 당원들을 확보해라” 타이베이와 타이중(臺中)에 노동조합이 탄생했다.


타이완의 초기 중공 당원은 70명에 불과했다. 적은 숫자였지만, 한결같이 최일류 지식인이었다. 세상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우수한 청년들이다 보니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 중요 교육기관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렸다. 좌익 사조가 학원가에 범람하기 시작했다. 중공 당원들은 토착 세력으로 구성된 타이완 공산당과는 선을 그었다.


시부야 사건의 여파가 지지부진하자, 좌익 청년들은 타이완학련에 손을 내밀었다. 타이완학련의 구성원들은 순수했다. 내민 손을 덜컥 잡아버렸다. 공동으로 집회를 열었다. 타이완학련은 의아했다. 참가 단체가 예상 외로 많았다. 구호도 예사롭지 않았다. “미제(美帝)의 화교 박해에 엄중히 항의한다” “미국의 일본 우파세력 부식에 항의한다” “미국은 고도의 전략적 음모를 중지해라” 시위대는 저지선이건 뭐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국 영사관에 항의 문서를 전달하고 장관공서를 에워쌌다.


타이완 광복 1주년을 앞두고 장제스가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기념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단상에 화색이 감돌고 용춤이 요란했다. 단하의 반응은 냉담했다. 국군을 환영하던 열정은 불과 1년 사이에 타버린 잿더미처럼 싸늘했다. 옛 총독부 문전에 ‘개새끼 간 자리에 살찐 돼지가 왔다’는 내용의 만화가 걸렸다.


미국 기자 한 사람이 타이완대학 교수를 방문했다. 노 교수는 타이완인의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미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관대하고 타이완인들에게 잔혹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너희 미국은 일본에 원자탄을 두 개 밖에 투하하지 않았다. 우리 타이완에는 그 1000배에 해당하는 장제스를 투하했다.” 3개월 후,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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