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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25)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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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나고야(명고옥)의 석학 「아사히나·겐슈」(조비나현주)의 전송을 받으며 이른 새벽 쇼오고오인(성고원)을 출발한 신유한공일행은 동쪽으로 걸음을 재촉, 나루미(명해)에서 점심을 들고 이경(밤10시전후)이 되어서야 오까자끼(강기)에 도착, 하루밤을 묵었다.
오까자끼는 에도(강호) 막부 2백60년의 문을 연 「도꾸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의 출생지다.
오까자끼라는 조그만 성의 성추의 아들로 태어난 「도꾸가와」는 6살때부터 「오다·노부나가」(직전신장), 「이마까와·요시모또」(금천의원) 등 이웃의 힘있는 영주들에게 인질로 잡혀다니는 고초를 겪으며 전국시대를 헤쳐나가 마침내 일본천하의 패권을 잡게된다.
인내로 대업을 이룩한 「도꾸가와」의 일대기는 패전후 어려움을 겪던 일본에서 재기의 꿈을 심어주는 자극제 역할을 했으며 우리나라에도 『대망』이란 이름으로 소개돼 있다.
「도꾸가와」와 연고가 깊은 만큼 에도시대 오까자끼는 『성과 해자와 성루와 집, 그리고 거리의 부유함이 명고옥과 갑·을을 다툴만한』 (『해유녹』) 번화한 도회였다.
지금은 나고야와는 비교도 안되는 인구20만 중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전후의 「도꾸가와」 붐을 타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신공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때는 막부에서 파견된 문위사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장군의 문안인사를 전했다.
다음날은 도요하시(풍교)에서 묵었다. 도요하시의 숙사는 고신(오진)사였다. 당시의 고신사는『웅장하고 화려하며 사각연못에 꽃들이 우거진』 (『해유록』) 대가람 이었다.
그러나 45년6월 미군의 폭격으로 웅장했던 건물은 물론, 절에 전해져 내려오던 수천점의 그림·서적등이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62년에 새로 지었다는 회칠한 2층 건물이 본당에 들어서 있다.
5천평이 넘던 절의 부지도 전후 도시계획으로 잘려나가 지금은 3천4백평으로 줄었다는 얘기다.
주지 「다떼마쓰」(입송변성·66)씨는 78년과 80년에 한국을 방문, 경주 불국사, 속리산 법주사, 양산 통도사등을 모두 찾아보았다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지독한 검안을 피해 92km 우회한 여자도>
통신사 얘기를 물으니 이 절에 묵어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기록은 남아 있는것이 없다고한다.
금년에 절에서 발행한 『원조대사어법어』라는 책자에 절의 유래와 역사를 소개하는 가운데 『관영13년(1636년)을 시발로 수차 건너온 조선사절의 숙사가 되고』란 구절이 있다. 연대가 엉터리인 것으로 보아 적당히 집어 넣은 말인듯 했다.
도요하시의 고신사에서 1박한 신공일행은 다음날 악명 높았던 검문소, 아라이 세끼쇼(신거관소)를 거쳐 하마마쓰(빈송)로 들어간다.
아라이 세끼쇼는 시즈오까(정강)현남쪽에 있는 하마나(빈명)호와 태평양을 잇는 이마기레(금절·혹은 금절)수로의 서쪽 도선장에 설치된 검문소였다.
전국시대 일본의 봉건영주들은 자기영내로 들어 오는 길목마다 세끼쇼를 설치, 통행세를 받았다. 영어의 「customs」를 일본인들이 관세라고 번역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일본을 통일한 「도꾸가와」 막부는 난립한 세끼쇼를 대폭정리, 그 대부분을 없애도록하고 에도방위에 필요한 15개 세끼쇼만을 남겨 직접 관리했다.
세금을 걷어들이기 위한 관소에서 방위목적의 검문소로 성격도 바뀐 것이다.
에도로 통하는 도오까이도(동해도)의 길목에 자리잡은 아라이 세끼쇼는 하꼬네 세끼쇼(상량관소)와 함께 15개 세끼쇼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검문소였다. 검색도 철저했다.
특히 「이리 뎃뽀 데온나」(입철포 출녀)라고해서 에도로 들어가는 무기와 에도에서 나오는 여자에 대한 검색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기반입은 보안상 이유에서, 그리고 여자는 에도에 살고있는 영주들의 가족등 인질의 탈출이나 기밀의 누출을 막기위한 조치였다.
여자에 대한 검색은 전담 여관이 머리카락까지 샅샅이 뒤지는 엄한 것이었다. 에도막부가 봉건영주들의 관리에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알수있다.
나중에는 지독한 검색을 피하기 위해 둘레 92km의 하마나호를 우회하는 여자들이 생겨 이들이 이용하던 우회도를 히메가이도(희가도)라고 불렀다.

<배 1백15척을 징발 요시다번 영접 만전>
에도로 가는 여행객은 봉건영주를 포함해서 모두 이 검문소를 통과해야 선착장으로 나가 배를 탈수 있었다. 검문 없이 통과된것은 막부의 장군과 조선통신사 뿐이었다.
아라이에 도착한 신공 일행은 이곳에서 점심대접을 받고 요시다(길전)번이 준비한 배를 탔다. 「도꾸가와」 막부는 1702년부터 아라이 세끼쇼의 관리를 요시다번에 위임, 신공 일행에 대한 접대와 도항에 대한 책임은 요시다번이 맡고 있었다.
육로가 시작되는 요도(정)에서부터 일행을 따라온 인부와 말들은 이곳에서 되돌아 가게 되므로 일행은 선착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해유록』을 보자.
『강에는 누선 6척과 작은배 수십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선에는 겨우 네댓사람이 앉을수 있으며 까만칠이 거울처럼 반짝인다. 2층 난간은 영롱한데 아름다운 장막으로 덮었다. 드디어 흐름을 가로 질러 동쪽 기슭에 닿았다. 기슭에는 여러말들이 마치 진을 친것처럼 줄지어 서있었다니『통항일남』이란 기록이 따르면 요시다심은 일행이 도착하기 4개월반전부터 도항준비를 시작했다.
아라이 세끼쇼 사료관에는 지금도 신공일행이 이곳을 통과할때 배를 징발한 기록이 『조선인신거숙기선촌촌장』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도요하시에서 6척, 다까마쓰(고총)에서 2척등 요시다번 영내의 거의 전어촌에서 1백15척의 배를 징발한 것으로 돼있다.

<통행증·도항 기록등 관광객의 눈길끌어>
까만칠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고급 누선에는 3사와 제술관등이 나누어 타고 그밖의 수행원들은 임시로 조달한 배를 타고 건넜다.
이처럼 도항을 위한 절차가 까다롭고 건너기 어렵던 이마기레수로도 지금은 대부분이 매립되고 무수한 다리가 놓여 철도·자동차도로가 3중4중으로 달리고있다.
아라이세끼쇼는 지금도 아라이역에서 서쪽으로 8백m정도 떨어진 호숫가에 옛날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55년에 개축한 건물이라 했다. 명치2년(1869년)까지 현역으로 활약하다 지금은 특별사적으로 지정돼 2백엔씩의 입장료를 받고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도로로 면한 정문에 「사적신거관지」라 새긴 높이2m의 석주가 서있고 깨끗이 손질된 넓은 마당에는 옛날 이곳을 지나던 여행객이 꿇어앉아 신고하던 자리, 짐을 올려놓고 검사받던 하물석(荷物石), 검문·검색을 받는 요령을 써놓은 고시판등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건물안에는 칼을 차고 준엄한 자세로 앉아있는 관리들의 모습이 실물크기의 인형으로 전시돼있다.
세끼쇼 옆에 새로 지은 2층의 사료관에는 세끼쇼에서 쓰던 도구·무기·통행증·도항기록등이 전시되고있다.
통신사에 관한 기록을 물으니 배를 징발한 명세서인 『조선인신거숙기선촌촌장』과 통신사의 도항기록을 정리한 『내내년 조선인내조제사공장』 등 2권을 내다보여준다.
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더 있음직 하나 아직 자료정리가 안되어 있고 새 사료관을 짓기전 목조건물에 자료를 보관했다가 유실, 훼손된 것이 많다는 직원의 설명이었다.
나고야의 조선사연구회원인 일본인 「스즈끼」(영목의웅)씨가 이곳까지 동행했다가 작별했다.
글 신성순 특파원
사진 김주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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