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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명자의 과학 오디세이

방폐장은 폭탄 돌리기 아니라 사회적 신뢰 확보가 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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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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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한국과총 차기 회장

2주일 전, 정부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을 행정예고했다. 앞으로 12년간의 부지 선정 절차 등 안전관리 절차와 방식을 제시한 중장기 관리 로드맵이다. 주요시설(지하연구시설·중간저장시설·영구처분시설)은 경제성·안전성을 고려해 동일 부지에 집적하되 국제공동저장·처분시설 확보 노력도 병행한다고 돼 있다. 특정지역을 후보지역으로 예단하지 않고 투명한 절차와 방식을 단계별로 제시한다면서 지역주민의 신뢰와 수용성 확보를 강조한다. 부지 선정 기구는 고준위 방폐물 관리 절차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근거를 마련하고, 재원은 방사성 폐기물 관리기금으로 확보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고준위 방폐물 정책은 1983년부터 9차례 추진됐으나 줄줄이 무산됐다. 필자는 ‘현대사회와 과학’(92년) 책에서 원자력을 다룬 인연으로 토론회에 불려 다니다 날벼락도 맞았다. 95년 1월 인천 시청에서 열린 ‘굴업도 방폐장 선정 계획’ 공청회에 갔다 시작도 하기 전에 전방위로 날아든 밀가루·계란 범벅 세례를 받은 것이다. 도망칠 이유가 없다 싶어 꼿꼿이 앉아 있다 몽땅 뒤집어썼다. 교복처럼 입던 투피스는 결국 비린내 때문에 버렸다. 그러는 사이 주무부처도 바뀌고 복수의 주무장관이 사임하는 우여곡절을 거친다.

2003년 3월 초엔 고 노무현 대통령 주재 국정 세미나에서 ‘국민의 정부 국정 성공사례’ 발제를 맡게 됐다. 낙동강 수계 특별법 제정과 특별대책 수립 덕분이었는데, 수천 명의 시위와 화형식,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치러진 공청회 등 2백여 회의 대화 끝에 얻은 값진 결실이었다. 이어서 바로 뒤에 발표한 실패사례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선정사업’이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이른바 ‘부안 사태’가 발발한다. 그리고 2004년 말 중·저준위 처분장과 고준위 시설을 따로 건설한다는 발표가 나온다. 결국 중·저준위 처분장 부지가 선정되기까지 19년, 건설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정작 고준위 처분은 뒤로 밀렸다. 경주 중·저준위 처분장 시설을 둘러본 국제원자력기구(IAEA) 전문가가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해도 괜찮을 정도’라고 평한 것은 마냥 칭찬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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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이 땅에서 원전이 가동된 지 38년, 고준위 방폐물 정책을 시도한지 33년 만에, 장기적 안전관리 절차와 체계를 제시한 기본계획이 나왔다. 아직 로드맵일 뿐 구체적인 계획안은 들어있지 않다. 불확실성이 내재한 또 하나의 시작이란 게 옳다. 원자력 분야는 ‘가치(價値)’에 민감하고 찬반 선호가 뚜렷하다. 뇌 과학 연구는 사람의 가치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한 쪽이 다른 쪽을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가 가치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국민인식조사(2014년)에 의하면, 정부 관련 조직의 신뢰는 30% 수준이다.

기본계획 발표 후 언론에 비친 반응은 어떤지 궁금했다. 비록 열흘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나, 언론 보도의 프레임이 시사하는 바는 중요한 가늠자가 된다. 실제로 언론 보도 프레임은 정책 추진의 판단기준이 되고, 기술위험의 사회적 인식을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원자력처럼 그 위험성이 널리 알려진 이슈에 대해서는 보도 프레임보다 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실증적 연구가 있다.

그동안 30건 남짓의 보도 가운데 스트레이트 기사를 제외한 칼럼과 논설을 검색해 프레임을 분석해 봤다.

1. 계획안 수립의 ‘시급성’과 적절성 프레임 : 사용후핵연료 관리 시간계획 제시를 높게 평가하고, 임시저장수조가 포화되고 있으니 더 이상 늦출 수 없음을 강조한다. 기본계획의 조속한 확정과 공모 절차 진행을 촉구한다.

2.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정책 정당성 프레임 : 계획안 수립이 투명성과 정당성을 갖췄다고 본다. 그러나 방폐물 관리 기술과 조직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지역주민도 참여 자격과 권리를 갖는 시민참여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는 빠져있다.

3. 공론화 과정과 내용의 제한성 비판과 해당 지역 갈등 프레임 : 임시저장고 추가 건설 등에 반발하는 해당 지역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 한다. 주요 쟁점으로 대두될 발전소 단지 내 임시저장 시설 확장에 대한 지역 반발에 대한 해법 제시가 없이 부지 확정 시한을 2028년으로 유예한데다가 부지 선정의 구체적 계획이 없다고 비판한다.

4. 에너지 체계 전환 등 기본적 핵심 쟁점이 배제된 미봉책 프레임 : 공론화에서 사용후핵연료 처리와 신규 원전 증설을 분리시켜 다룬 것을 비판하고,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원전 건설에 대한 공론화의 일부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배출된 고준위 방폐물은 반드시 처리해야 하고, 기후변화 대응, 미세먼지 대책 등으로 원전 증설을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 충돌한다.

대체로 이들 네 가지 프레임의 비중은 비슷했다. 내용상으로는 1과 4, 그리고 2와 3의 프레임이 정면 대립한다. 긍정적 프레임은 주로 정부와 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그룹의 의견, 그리고 부정적 프레임은 주로 반핵 그룹의 주장으로 구성된다. 원자력 논쟁이 늘 그랬듯이, 여전히 찬반으로 갈려 통합적인 시각이 보이질 않는다. 소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제3 지대가 형성되지 못한다면, 앞으로 논의가 본격화될 때 해당 지역에 국한된 갈등 사안으로 좁혀져 찬반 양측이 첨예하게 부딪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켜 총체적 협상 역량을 높이는 진짜 공론화가 과제다.

고준위 방폐장 사업은 조건이 훨씬 양호한 선진국에서도 심각한 갈등과 시행착오를 빚고 있는 난제이다. 현재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도 소수다.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 직접 처분장의 난제를 해결한 국가는 원자로 4기를 가동하는 핀란드다. 인구밀도는 1제곱킬로미터 당 16명이라서 우리나라의 490명과 대조적이다.

핀란드는 94년에 원자력법(Nuclear Energy Act, 87년) 개정으로 “국내에서 발생한 모든 방폐물은 국내에서 처분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뒤, 2000년에 올킬루오토(Olkiluoto)를 사용후핵연료의 (초)장기 지하 저장시설 부지로 선정한다. 시설의 명칭은 온칼로(Onkalo, ‘동굴’)로, 지하 500m까지 파고 들어갔다. 설계수명은 10만년이고, 원전 부지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2015년에 시설의 건축 허가(construction license)를 받은 포시바(Posiva)사는 2016년에 공사를 시작, 2023년 가동 목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고준위 방폐장 처분장 건설에 착수한 나라는 스웨덴이다. 원자로 10기를 4개 원전 부지에서 운영하다가 한 군데(Barseback)는 폐쇄됐다. 스웨덴 인구밀도는 1제곱킬로미터 당 22명이다. 원전 부지는 동과 서에 분포되어 있다. 중·저준위 방폐물 영구처분장은 스톡홀름 북쪽 150㎞에 위치한 포스마크(Forsmark)에 있다. 그런데 고준위 방폐물은 그 아래쪽의 오스카샴(Oskarshamn)에 중간저장한다. 2009년 고준위 영구처분장으로 포스마크가 선정됐다. 즉 사용후핵연료를 모아 오스카샴에 중간저장했다가, 배를 타고 3시간 이상 걸려 최종처분장인 포스마크로 수송하도록 된 것이다.

스웨덴의 방폐장 프로젝트도 시행착오를 거쳤다. 76년부터 법 제정에 들어가, 77년 법 통과로 처분장 선정을 시작한다.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 시설은 오스카샴에 건설키로 해서 85년에 시작되고, 포스마크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건설은 88년도에 결정된다.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건설을 위해 80년-85년 사이 암반이 튼튼한 후보지역을 대상으로 공사를 시작하려다 지역사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친다. 그래서 86년에 안전규제 기관인 환경부가 개입, 원점으로 돌아가 자발적 선정 과정을 택한다.

그 과정에서 92년부터 각 지방정부에 편지를 보내는데, 90년대 지방투표에서 두 개 지역은 반대로 결정한다. 나머지 후보지역인 오스카샴과 포스마크(Osthammar 소재, 인구 1만5천명)는 둘 다 원전과 방폐물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당시 주민 80%가 시설 유치에 찬성하는데, 지역주민들이 이미 원전에 익숙했기 때문에 높은 지지를 보였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처분장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가 나오자 지지세가 꺾인다. 방폐장 사업자인 SKB(Swedish Nuclear Fuel and Waste Management Company, 네 개 전력사의 컨소시엄)는 강도 높은 캠페인으로 수용성 확보에 나서고, 특히 사기업이 아니라 공공의 기관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 주력한다. 문화, 체육 행사 후원을 비롯해 지역경제를 지원하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마련하는 등 신뢰를 쌓는다.

2002년부터 시작된 두 지역에 대한 조사 결과 2009년 포스마크(인구 수백 명)가 고준위 방폐물 최종 처분장 부지로 결정된다. SKB는 후쿠시마 사고가 난지 나흘 뒤(2011. 3. 16) 포스마크 사용후핵연료 처분장 허가를 신청하고, 동시에 오스카샴에 봉인 시설 허가서 신청을 한다. 이 서류는 관계기관(Swedish Radiation Safety Authority와 Environmental Court)의 철저한 리뷰를 거쳐 정부의 인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리뷰에서는 특히 구리 캐니스터와 벤토나이트 완충장벽이 모델링에서처럼 안전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가 관심사다. 이 시설은 2020년 완공 계획이다.

정책의 합리성과 비용-효과 측면에서 볼 때,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과 고준위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도 포스마크에서 하는 상황에서, 고준위 방폐물 중간저장시설을 오스카샴에 건설함으로써 수송의 부담을 늘린 결과가 된 것이다. 필자는 2013년 한국여기자협회 시찰에 동행해서 스웨덴 시설을 둘러보면서, 이 점에 대해 물었다. 대답인즉 “정치인들이 그렇게 분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현지 시찰에서 사업자가 특히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물었다. 답변은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 관련 보고서를 철저하게 작성하고, 리뷰해서 보완했으며, 그런 노력이 지지의 기반이 됐다고 했다. 모로코 출신 50대 여성인 SKB 부사장은 부지 선정 과정 20여 년 동안 눈만 뜨면 주민을 만났고, 무려 1만1000번이라고 했다.

그는 여성이 원전에 비우호적이고, 남성은 우호적- 이런 경향은 어느 나라나 예외가 아니다-임을 가리켜 여성은 브레이크고, 남성은 액셀이라고 비유했다. 브레이크 없이 자동차가 제대로 갈 수 없듯이, 반대하는 목소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설명회에 오라고 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고 했다. 간호사, 교사 등 소규모 그룹으로 찾아다니며 아담하고 친근한 분위기에서 만났다. 또 대화에서 상대방을 설득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고, 최종 결정은 주민의 손에 맡긴다는 자세를 가졌다고 했다.

미국도 방폐물 관리 정책에서 시련을 겪고 있다. 유카 마운틴에 건설하고 있던 최종 처분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예산 전액을 삭감해 무산됐다. 그 뒤에 설치한 블루리본위원회(Blue Ribbon Commission)의 최종보고서(2013년)는 “사용후핵연료를 중간저장하고, 동시에 이송계획을 철저히 세우라”고 권고한다. 원자로 100기 정도를 가동하는 상태에서 사용후핵연료는 두 가지 형태의 라이센스로 원전 부지 내에서 관리하고 있다. 각각 부지 내 임시저장수조 저장과 건식 중간저장 방식의 Site-Specific License와 General License가 그것이다. 그러다가 부지 내 저장용량이 다 차고 있어 부지 외 중간저장시설 건설이 다급해진 것이다.

독일의 경우도 시행착오의 전형이다. 공론화 과정 없이 79년에 고어레벤에 고준위 방폐물 최종 처분장 건설을 위한 부지 조사에 들어갔다가,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격렬한 반발로 중단된다. 그 뒤 99년에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 결국 부지 외 집중식 저장시설 설치 추진은 수송의 난관에 부딪쳐 중단되고 부지 내에 그대로 저장하는 두 가지 형태를 병행하게 됐다.

일본의 방폐물 관리도 복잡하다. 중·저준위 방폐물 영구처분장은 92년부터 로카쇼무라(六ヶ所村) 시설(120만평)에서 운영하고 있다. 앞의 핀란드, 스웨덴, 독일,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국가이다. 2012년부터 로카쇼무라 재처리 시설 가동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 시설 설치가 당면과제가 된다.

당초 일본 정부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영구처분시설을 유치하는 지방자치단체에 해마다 보조금(20억 엔까지)을 지급하는 인센티브 제도를 마련한다. 2007년 고치(高知)현의 도요(東洋)정이 유치 신청을 했으나,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신청이 취소된다.

결국 중간저장시설 부지 선정에 들어가 로카쇼무라 재처리 시설에서 북서쪽 50km 위치의 무쯔시(陸奧市)에 50년 기한(저장 물량은 우라늄 5000 톤)으로 건설하기로 합의를 도출한다. 무쯔 시장은 이 사업의 유치로 교육·의료 등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해양과학연구소를 일본의 대표적 연구소로 키우는 등 “세계적인 해양 연구도시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지자체의 다양한 노력으로 지역사회의 수용성을 확보한 성공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이번 기본계획안이 역대 정부가 쌓아 온 정책적 자산의 연속선상에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가 제안(2015. 6)한 핵심 사항을 최대한 존중해 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말한다. 그 내용은 현재로서 최선의 관리방식을 택하면서 현실적 대안도 감안한 것이고, 향후 여건 변화를 반영하여 5년 단위로 보완할 것이라 한다. 앞으로 산업부는 행정절차법상 공청회 등을 거쳐, 7월경 총리 주재 원자력진흥위원회를 거쳐 확정하고, 금년 중에 과학적 조사와 부지 선정 등 투명한 절차를 담은 ‘고준위 방폐물 관리 절차에 관한 법률’(가칭)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원자력처럼 사회적 갈등이 심한 장기적 사업에 대해서는 국회의 법률 제·개정이 더 중요하다. 장기간에 걸쳐 사업의 일관성과 체계성을 갖추기 위한 법적 근거가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행 사용후핵연료 관리 관련 주요 법률로는 「원자력안전법」,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비롯해 관련 하위 법령과 시행규칙이 있다. 그러나 2004년 중·저준위 폐기물을 고준위 폐기물과 분리하여 관리하기로 하면서, 관련 법률은 중·저준위 폐기물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어, 조속히 고준위 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대한 법적 근거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2009년에 발효된 방사성 폐기물 관리법에서 그간 개별 법률에 산재돼 있던 사항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그러나 방폐물 관리에 관련되는 주요 법률, 하위 법령, 시행령, 규칙, 고시 등을 재정비해 용어의 정의와 개념을 정비하고 일관성과 체계성을 높여야 한다. 예를 들면 현행법상 중간저장과 영구처분은 구분되고 있으나, 임시저장과 중간저장의 개념 차이는 불명확하다. 다만 관리주체만 구분되어 있다. ‘원자력 발전소 관계시설’,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 등도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법적 근거가 불분명한 용어의 사용으로 혼란을 빚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용후핵연료 관리 주체, 절차와 과정, 처분 방식, 처분 지역 선정, 그리고 지원 대책 등에 관해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법적 규율을 확립하는 개정 작업이 필요하다.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해야 할 사안은 많다. 예를 들면 현행 원자력법 제77조(허가기준) 제3호는 폐기시설로 인한 건강과 환경상의 위해 방지 항목을 규정하고 있다. 그 선량 기준을 각종 폐기시설의 특성에 따라 폐기 시설별, 단계별로 구분해 설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현행 체계상으로는 방사성 폐기물의 저장, 처리, 처분시설과 그 부속시설에 대한 인허가는 원자력법에 의거해 폐기시설 등의 건설·운영의 단일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그러나 폐기시설 운영 기간은 원자력 시설 설계수명보다 길고, 운영체계상 시설 건설, 폐기물 수납과 안전관리, 폐쇄 후 관리기간, 장기 모니터링 기간 등 더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다. 국제적으로 방사성 폐기물 안전협약에서도 건설 단계의 안전성 확인과 운영 단계의 안전성 확인을 별도로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건설과 운영, 폐쇄의 전 과정에 걸쳐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다단계 인허가 체제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법적 기초가 갖추어졌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원자력 소통과 거버넌스의 성공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원자력기구(NEA)는 방폐물 정책 수립에서 참여적 의사결정 방식을 강조한다.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안 도출에서 거버넌스의 모범사례는 몇 가지가 알려져 있다. 영국의 CoRWM(Committee on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캐나다의 NWMO(Nuclear Waste Management Organization), 스웨덴의 RISCOM(Risk Communication), 유럽회의의 COWAM(Community Waste Management) 등이 그것이다.

97년부터 스웨덴에서 진행된 RISCOM 프로젝트의 ‘RISCOM 모형’은 벤치마킹 대상으로 시사적이다. 기본 축은 진실성(truth), 합법성(legitimacy), 확실성(authenticity)이다. 진실성은 ‘기술적·과학적 요소를 옳게 적용시키고 있는가?’, 합법성은 ‘사회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 확실성은 ‘조직적으로 성실하게 일을 수행하고 있는가?’가 지표다. 이들 세 요소를 아우르는 효율성 개념을 제시하고, 투명성과 대중 참여를 강조한다. 이 모델에서는 의사결정과 추진 과정에서 진실성·합법성·확실성을 확인하는 체계적 프로세스 확립이 투명성의 원천이라 보고 있다.

법적 기반과 더불어 행정 체제의 작동이 중요하다. 원전 정책과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은 시간 차원이 길다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5년 단임 정부에서 단기적으로 순환 보직되는 공직사회가 어떻게 이 장기사업의 구심점이 되도록 할까. ‘폭탄 돌리기’ 식이 되지 않도록 추진 역량을 갖추려면 국가 장기계획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식과 체제가 필요하다.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체제가 갖춰진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인드셋이 중요하다. 기본계획안이 확정되는 시점부터 진짜 소통과 공론화의 시작이라는 각오가 필요하다. NEA는 이해당사자들이 서로의 다양한 관점과 이해, 가치를 충분히 공유하고, 소통을 통해 사회학습을 실현하는 것이 공론화의 요체라고 말한다. 소통을 통한 사회학습에서 정부의 책임 있는 역할이 중요하다. 부처별, 사업 주체별, 기관별, 전문가 그룹별로 갖고 있는 ‘부분’의 관점을 통합하여 국가 ‘전체’ 차원의 통합적인 시각을 갖추고 통합조정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소통에서는 해당 지역사회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선택을 한다는 점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지점이 신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원전 정책에서는 신뢰가 알파이자 오메가다. 나아가서 모든 관련 주체가 공동체 의식으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할 때 사회적 합의 도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 수십 년 간 치른 값비싼 사회적 비용이 헛되지 않게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 협상력을 보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한국과총 차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