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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선영의 노벨상 이야기

조현병의 존 내쉬 -199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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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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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요즘 잇따른 살인과 폭력사건으로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심지어 정신질환자들을 잠재적 범죄자처럼 다룬 언론도 있다. "정신병"에 대한 편견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더욱 국외자로 몰리면서 근거 없는 차별을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조현병, 자폐, 과잉행동과 같은 정신 관련 증세를 가졌던 사람들 중 과학, 예술, 사업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낸 경우가 많다. 게임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공로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쉬가 한 예다.

내쉬는 1928년 전기기술자인 아버지와 라틴어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동이었지만 그렇다고 올A 학생은 아니었던 내쉬를 극진히 보살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쉬는 끊임없이 독서를 했고, 바하 음악의 전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불었다고 한다. 그는 전액 장학금으로 지금의 카네기멜론 대학에 입학하여 화학공학에서 화학으로, 다시 수학으로 전공을 바꿔가며 19세의 나이에 학사와 석사학위를 한꺼번에 받았다. 당시 내쉬는 독일의 위대한 수학자 이름을 따라 “젊은 가우스”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학을 잘했다. 졸업 후에는 지도교수로부터 "내쉬는 천재다"라는 단 한 줄의 추천서를 받고 프린스턴 대학원 수학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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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린스턴 대학은 수학과 과학에서 세계의 중심지로 여겨졌는데, 아인슈타인과 수소폭탄의 수학적 이론 및 현대식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기여한 존 폰 노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폰 노이만은 1944년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게임이론을 발표했는데 이는 경쟁에 대한 최초의 논리적, 수학적 해석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론은 한 사람이 승리하면 다른 사람은 필연적으로 패배하는 승자독식의 제로섬 게임을 다뤘기 때문에 특수 상황을 제외하면 현실 사회에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내쉬는 경쟁자들간의 비협조적 관계에서도 상호간에 이득을 보는 것이 가능한 상황을 연구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기업 간의 경쟁, 무역 협상, 의회에서의 여야 간 협상, 심지어는 생물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게임이론이 정립된 것이다. 이러한 “내쉬 균형” 이론으로 그는 단 27쪽 분량의 학위 논문을 쓰고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고, 그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게 된다.

내쉬는 1951년 MIT 수학과에 강사로 취직하면서 격동의 삶을 시작한다. 1년 후 엘레노 스티어라는 간호사와 사귀었지만, 내쉬는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그녀를 떠났다. 1954년에는 동성연애 함정 단속반에 걸려 수난을 겪었고, 1957년에는 MIT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엘리사 드 라드와 결혼했다. 1958년에는 MIT로부터 정년 보장을 받았지만 불과 1년 후 사임했다.

내쉬의 행동은 항상 남들과 달랐지만 그의 병적 증세가 문제가 된 것은 1959년부터였다. 그의 정신 상태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 잘 그려져 있다. 그의 증세는 망상과 환청이었는데, 예를 들면 빨강색 넥타이를 맨 사람은 모두 자기를 해치려는 공산주의자로 믿는 것이었다.

1959년 내쉬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린 학회 강연에서 황당한 언행을 하자 그의 정신 문제는 만천하에 알려졌다. 병원에서 망상성 조현병으로 진단받은 그는 결국 MIT 교수직에서 물러나 10여 년간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살아야 했다.

삶이 너무 힘들어진 부인은 1963년 그와 이혼했고, 내쉬는 모친이 있는 버지니아로 갔다. 내쉬는 강제 입원과 투약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성적 생각으로 망상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했다. 1970년부터 전처 라드는 프린스턴 근방에 있는 자기 집에 내쉬가 머물도록 했다. 프린스턴 대학은 그에게 도서관을 사용하도록 하고, 강의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는 특별했기 때문에 캠퍼스의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눈에 띄었지만 그가 실제 누군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일반사회에서와 달리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그런 행색과 괴짜 행동을 ‘타인과 다름’ 정도로 간주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내쉬는 프린스턴 공동체의 일원처럼 느꼈다. 증세가 호전된 내쉬가 1980년대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을 배워서 서서히 당대의 수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1985년부터 스웨덴의 노벨상위원회는 게임이론에 대한 수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내쉬의 기여도는 물론 그의 병력까지 조사했으나, 그의 정신 상태 때문에 선정에 고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게임이론을 연구하던 경제학자나 수학자에게 내쉬는 경배의 대상이었다. 내쉬의 동료였던 프린스턴 대학의 해롤드 쿤 교수는 이들과 함께 노벨상위원회를 집요하게 설득하였고, 내쉬는 마침내 1994년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7년 후 전부인과 재혼한 내쉬는 인생도 극적으로 마감했다. 2015년 부인과 함께 노르웨이 정부가 특출한 수학자에게 주는 아벨상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 집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같이 사망한 것이다. 향년 86세였다.

어떤 이는 내쉬의 균형이론을 20세기의 10대 경제학 이론 중 하나로 꼽고, 혹자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푼 것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라고 한다. 일부 수학자들은 내쉬의 균형이론이 그의 업적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 얘기할 정도로 그는 수학 분야에서도 기념비적 성과를 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이 모든 성과를 30세 이전에 이뤘다는 것이다. 이 후 그는 논문을 낸 적도 없고, 추후 프린스턴의 관대한 배려로 시니어 수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것 이외에는 직장을 가져본 적도 없다

내쉬의 파란만장한 삶에는 우리가 주목할 요소들이 많다. 내쉬의 천재성을 알아본 학부의 지도교수, 그를 파격적 조건으로 유치하고 27페이지짜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준 프린스턴 대학 수학과, 이혼한 전남편을 돌본 앨리샤, 정신이상자가 캠퍼스를 사용하고 배회할 수 있게 해준 프린스턴 대학교, 주저하는 노벨상위원회를 설득한 동료 쿤과 일단의 수학자들 등이다. 책과 영화로 나온 ‘뷰티풀 마인드’는 내쉬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사실은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뷰티풀’하게 대했기 때문에 내쉬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주변의 관심과 배려가 나은 산물이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