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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쐈다…오바마 “가장 위대한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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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는 가장 위대한 사람(The Greatest)이었다. 그를 알게 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링 안에서는 용기를, 젊은이들에겐 영감을, 약자에겐 연민을 보여줬다.”(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우리는 거인을 잃었다.”(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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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위)가 1974년 자이르에서 열린 WBA, WBC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조지 포먼(미국)을 8회에 쓰러뜨리고 있다. [AP=뉴시스]

‘20세기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74)가 4일(한국시간) 세상을 떠나자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설적인 복서 알리는 링 바깥에선 차별과 싸우며 평화를 노래했던 ‘세계의 챔피언’이었다. AP통신은 4일 알리가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2013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자택에서 머물렀던 그는 호흡기 질환이 악화되면서 병원에 옮겨졌다. 그러고는 이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올림픽서 금 따고도 멸시당해
강에 메달 버리고 무슬림으로
“백인이 원하는 챔피언 되지 않겠다”

1942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다.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알리는 12세 때 아버지가 사준 자전거를 도둑맞자 경찰서에 찾아갔다가 이를 계기로 복싱을 시작했다. 당시 경찰관은 알리에게 “도둑에게 한 방을 먹이고 싶다면 복싱을 하라”고 충고했다.

60년 로마 올림픽에 미국 국가대표로 출전한 알리는 18세의 나이에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올림픽 영웅으로 받은 환대는 잠깐이었다. 그는 백인들의 멸시 및 차별과 싸워야 했다. 백인들이 주로 가는 식당에서 쫓겨나거나 욕설을 듣는 일도 잦았다. 61년부터는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가 지도자로 있던 흑인 무슬림 단체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활동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레스토랑 입장을 거절당하자 알리는 올림픽에서 획득한 금메달을 오하이오강에 던져버렸다. ‘노예에게 준 성을 쓰지 않겠다’며 자신의 이름도 버리고 ‘캐시어스 엑스(X)’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가 이슬람 지도자 엘리야 무하마드의 이름을 따 아예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는다.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결혼할 생각도 없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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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미국 마이애미의 훈련장에서 비틀스와 만난 알리. 왼쪽부터 폴 매카트니, 존 레넌,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과 알리. [AP=뉴시스]

프로로 전향한 알리는 64년 세계복싱협회(WBA)·세계권투평의회(WBC) 헤비급 통합 챔피언 소니 리스턴을 꺾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던 호언장담처럼 7라운드 TKO승을 거뒀다. 헤비급 선수답지 않게 빠른 풋워크와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했던 알리는 강적들을 꺾고 타이틀을 아홉 차례나 방어했다. 이슬람교 개종에 이어 흑인 인권운동에 나선 탓에 백인 사회는 그를 삐딱하게 바라봤지만 알리는 스스로를 ‘민중의 챔피언(people’s champion)’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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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가 65년 소니 리스턴(미국)을 쓰러뜨린 뒤 포효하고 있다. 알리는 한 해 전 리스턴을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AP=뉴시스]

알리는 67년 베트남전 징집 대상이 됐지만 “어떤 베트콩도 나를 검둥이(Nigger)라고 부르지 않는다”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했다.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던 그는 징역 5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3년6개월간의 법정 투쟁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지만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다. 어렵게 링에 복귀한 알리는 71년 타이틀전에서 조 프레이저에게 15회 판정패했다. 하지만 74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40연승을 달리던 24세의 챔피언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때려눕혔다. 복싱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정글의 혈투’다.

알리는 76년엔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와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알리는 이노키와 설전을 펼쳤고 두 선수의 대결은 전 세계 약 14억 명이 지켜볼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종합격투기의 시초 격인 이 경기는 맥없는 무승부로 끝났다. 이때의 인연으로 둘은 95년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알리는 81년 56승(37KO) 5패의 전적을 남기고 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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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WBC, WIBA 수퍼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승리해 챔피언 벨트를 두른 딸 라일라(왼쪽)와 알리. [AP=뉴시스]

알리는 84년 파킨슨병(손과 안면이 떨리고 말을 더듬는 신경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활발한 사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유엔 평화사절로도 임명됐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서 떨리는 손으로 성화에 점화하기도 했다. 99년 영국 BBC는 알리를 ‘21세기 최고의 스포츠인’으로 선정했다.

알리의 영결식은 10일 고향인 루이빌의 얌 센터에서 열린다. 얌 센터는 알리가 12세 때 복싱을 시작했던 체육관이다. 알리는 무슬림이었기에 가족 장례식은 이슬람 식으로 열린다. 그러나 공식 추모행사에는 여러 종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참석한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추모 연설을 할 예정이다. 알리 가족의 대변인 밥 거넬은 “알리는 모두의 챔피언이었고 인종과 종교·배경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헌신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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