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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헌재 15명 임명에 영향, 보수 일색 사법지형 바뀌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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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3 면

여소야대 20대 국회가 개원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협치(協治)를 얘기하며 야당과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과반을 넘긴 야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자 나타난 모습이다.


야당의 커진 파워는 최고 사법기관 구성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대법관은 모두 국회의 임명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회가 선출해야 하는 헌법재판관 역시 과반을 넘긴 야당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첫 케이스는 다음달 시작되는 이인복 대법관 후임 인선작업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9월 임기가 끝나는 이 대법관 후임에 야당이 흠잡지 않을 만한 인물을 내놓아야 한다. 임명권자인 박근혜 대통령과 야당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카드를 찾아야 한다. 청문회를 무리 없이 통과할 인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정치적 성향에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 현직 대법관은 “총선 결과로 복잡한 상황이 됐다”며 “이 대법관 후임 인선이 그 첫 관문이 될 텐데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과거에도 과반 의석 확보 당에 줄줄이 낙마2012년 김병화 대법관 후보자와 2015년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 이후 낙마하거나 낙마 위기에 처했다. 김 후보자는 위장전입과 다운계약서 등 각종 의혹에 스스로 물러났고, 박 후보자는 평검사 시절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관여해 야당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박 후보자는 우여곡절 끝에 새누리당이 임명동의안을 단독 처리해 대법관이 됐다.


이보다 앞선 2006년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소장 임명과 관련된 법률조항 논란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전 후보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지명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2013년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역시 특정업무경비 유용 의혹으로 국회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아 스스로 사퇴했다. 지명된 지 41일 만이었다.


이 모든 사태는 후보자들이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명권자나 제청권자보다 국민에게 선출된 국회의 판단이 중요함을 보여 주는 장면들이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국회의 힘은 더 두드러진다. 2002년 7월 장상 국무총리 후보자는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반대로 낙마했다. 1960년 김도현 총리 서리 인준 부결 이후 42년 만의 일이었다. 뒤이은 장대환 후보자 역시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반대표를 던져 국무총리에 오르지 못했다. 총리 인준안이 연이어 부결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여소야대가 되면서 이런 모습이 20대 국회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임지봉 서강대 로스쿨 교수는 “여대야소 국회에선 국회의 임명동의권이 사실상 유명무실했다”며 “하지만 야3당이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확보하면서 국회의 임명동의권이 대통령을 견제하는 실질적 수단이 될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장도 사실상 국회의 견제 받게 돼대법원장도 국회의 사실상 견제를 받게 됐다. 우리 법은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13인과 헌법재판관 3인, 중앙선거관리위원 3인에 대한 제청 및 지명권을 부여하고 있다. 막강한 인사권을 준 것이다.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우호적인 관계라면 사법부와 그 외 헌법기관들을 간접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20대 국회가 여소야대의 모습이 되며 대통령의 실질적 장악력이 약해질 전망이다. 대법원장 역시 대통령보다 표결로 실질적 승인권자인 야당에 거스르는 인물을 제청하기 어렵게 됐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대통령의 힘은 여당의 과반 의석 확보에 있는데 여당이 참패하며 승자 독식 구도가 깨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그는 “대통령이 다수 여당을 지휘하며 대법원장을 통해 헌법기관까지 장악했지만 정치지형의 변화로 대법원장이 대통령 입맛에 맞는 대법관 후보를 내놓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20대 국회는 임기 4년 동안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10명의 대법관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처리한다. 또 국회 몫인 3명의 헌법재판관을 선출하게 된다. 거대 야당의 탄생이 사법지형을 바꾸게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동안 대법원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대법관 대다수가 법관 출신에 보수 성향이 강한 인물로 채워졌다. 가치관의 대립이나 소수자에 대한 사건에서 소수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던 김영란·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 등 이른바 ‘독수리 5형제가 대법관으로 있던 때보다 다양성 면에서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시환 전 대법관은 “현재의 대법원은 다수당이던 새누리당의 가치관 성향에 맞는 대법관으로 대부분 구성됐다”며 “사법기관은 소수자의 목소리도 보호하는 기관이란 측면에서 다양한 인적 구성이 필요하고 여소야대 정국이 보수 편향의 대법원을 다소 진보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기 6년의 차기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지명권을 갖고 있어 막강한 인사권을 손에 쥐고 있던 박 대통령 입장에선 총선 참패로 임명권자로서의 막강한 위치가 불안해진 셈이다.


헌법재판소의 경우 내년 1월 임기가 끝나는 박한철 소장 후임을 정해야 한다. 총선 전까지 가장 최근에 임명해 임기가 많이 남은 서기석·조용호 재판관 중 임명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다. 하지만 다수석을 확보한 야당에 사실상 임명 동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과 국회선진화법 사건 등을 통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 두 재판관은 야당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어렵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분석이다.


“다양한 인물로 최소 30% 이상 채워져야”보수화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지형 변화를 위해 법조계 안팎에선 노동법 전문가와 소수자 보호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인물이 구성원이 되도록 국회가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시환 전 대법관은 “야당이 다수석을 확보한 만큼 사법권이 100% 보수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노동현장에서 발로 뛴 변호사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한 법조인이 두 헌법기관에 적어도 30% 이상 구성원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의 손금주 국민의당 수석대변인도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해 다양한 소리를 받아들이고 사회 공동선(共同善)으로 판단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 능력과 상대방의 의견을 배려할 수 있는 다양한 인물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구성원이 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소야대 구성만으로 견고하게 보수화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구성을 전면적으로 바꾸긴 어렵다는 관측도 있다. 한상희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헌재의 경우 재판관 9명 중 국회가 결정할 수 있는 재판관은 3~4인밖에 안 된다”며 “지금보다 다양한 시각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한양대 로스쿨 오영근 교수도 “사법지형의 많은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며 “법관 순혈주의가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어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질진 미지수”라고 했다. 다만 오 교수는 “사법기관의 순혈주의 극복을 위해선 변호사 자격을 고집하지 않고 교수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의 인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한편 현행법상 국회 청문회를 받아야 하는 국가기관의 직위는 모두 64자리다. 이 가운데 20대 국회보다 임기가 긴 3명의 대법관을 제외하면 총 61번의 청문회가 앞으로 예정돼 있다. 우선 감사원장이 내년 대선 전 임기가 끝난다. 황찬현 감사원장은 새누리당의 단독 표결을 거쳐 임명된 만큼 내년 후임 인선에서 박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또 내년 연말 임기가 끝나는 김수남 검찰총장도 인선을 다음 대통령에게 넘길 수 있지만 그 역시 다수 야당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64명 중 61명 이번 국회서 청문회국무총리 등 임명동의 및 선출을 받아야 하는 자리가 20인, 청문회를 통해 본회의 보고를 통해 이뤄지는 자리가 41인이나 된다. 야당 측 인사가 내년 대선에서 당선되지 않는다면 내후년 정국에서도 다수 야당의 검증은 당연한 관문이다. 여기에 국회가 후보자를 결정해 본회의 의결이 필요한 선출직 등을 포함하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거치며 보수화됐던 국가기관 전체 지형의 지각 변동이 이뤄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장은 “대법관 임명, 나아가 헌재소장·대법원장 임명 등 주요 현안과 특검 등 정치 문제도 대통령이나 여당의 의중대로 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며 “대통령과 여야가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이석·김유빈 기자oh.i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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