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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는 그저 내 본능, 시(詩)가 있어 연극이 좋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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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8 면

연극 ‘갈매기’

“한물갔다구? 천만에요. 그녀도 배우가 되기 위해 갈매기 같은 삶을 살았고, 아직도 왕성히 일하는 성공적인 인간이에요. 그러면서 외롭고 고독하죠. 한 인격으로서 그처럼 멋진 인격도 없어요.”?


지난달 26일 국립극단의(펠릭스 알렉사 연출?4~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기자간담회 현장.?


‘아르까지나’가 혼자 돋보이는 메인 포스터가 집단적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 의도를 단순화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자 자신의 배역이 “충분히 포스터를 장식할 자격이 있다”는 배우 이혜영의 항변이다.


마이크를 가로채 강하게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4년 만에 돌아온 ‘센 언니’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르까지나를 위한 변명’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의 표현으로 들렸다. 그렇다. ‘아르까지나’는 곧 이혜영이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도 ‘이토록 매력적인 배역에 태생적으로 딱 맞는 배우 이혜영이 있기에’ 작품 자체를 기획하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은 다소 억울한 눈치다. “나도 연출의 해석에 맞게 노력해서 역할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어느 쪽일지는 무대에서 확인해야겠지만, 개막 전 그를 살짝 먼저 만나봤다.

“연기를 쉰 적은 없어요.”


무슨 말일까. 2012년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했던 연극 ‘헤다 가블러’ 이후 4년 만의 컴백인데도 “쉰 적이 없다”니. “배우라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그저 본능”이란 뜻이다.


“전 매사에 연기를 하며 살아요. 슈퍼에서 두부를 사도 연기로 보인다죠. 아주 어릴 때부터 그냥 그랬어요. 말투나 표정, 몸짓이 다르다고 친구들이 놀리곤 했죠. 아버지를 너무 닮은 거예요. 펠릭스 연출도 아르까지나의 행동은 이게 실제인지 연기인지 자신도 모르겠다는데 아마 나도 똑같을 것 같대요. 그런 본능적인 사람이라서 김윤철 감독도 ‘태생적’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갈매기’ 연습실에서

간담회 때는 본인을 ‘신인배우’라고 소개했는데요. “펠릭스 연출과의 작업은 기존의 익숙한 나를 깨는 작업이었거든요. ‘갈매기’에 대한 오해는 물론, 내 연기 스타일까지 과감히 점프시켜 버렸죠. 익숙한 걸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걸 처음 경험하게 됐어요. 심지어 ‘그렇게 1차적인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모욕적인 말도 들었죠(웃음). 우는 장면이길래 우는 척하려고 하니까, 그게 아니라 왜 우는지 정말 생각해 봤느냐, 깊은 의미를 발견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거예요. 그런 얘기 듣는 게 처음이라 당황스러워 집에 가서 울기도 했죠. 근데 체홉의 본질이 바로 그거더군요. 아무 사건도 없지만 모든 대사의 의미를 깊게 파악해야 캐릭터가 잡히고 조화로운 앙상블이 되는 거죠. 덕분에 배운 게 많아요.”


극중 연출가 아들의 방식을 비웃는 아르까지나와 반대 상황인 건가요. “엄마를 구식이라고 공격하는 아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거죠. 나도 그래요. 이 작품에 필요하다면 나에게 익숙한 것도 낯설게 바라보겠다는 거지, 내 연기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죠. 그건 매너리즘이 아니라 개성이기 때문에 타협할 생각 없어요. 단지 희곡의 현실을 무대 위에서 실현시키려면 지휘자가 그린 그림을 따라야 하는 거죠.”

연극 ‘갈매기’는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 극작가’로 불리는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홉의 대표작이다. 유명 여배우 아르까지나와 ‘새로운 연극’을 부르짖는 연출가이자 그의 아들 뜨레쁠례프, 배우를 꿈꾸는 소녀 니나와 유명 작가이자 아르까지나의 연인 뜨리고린의 얼키고 설킨 애증 관계를 축으로 예술과 인생, 이상과 현실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지만 이번 무대는 의미가 다르다. 최근 ‘빛의 제국’으로 프랑스에 진출하는 등 ‘국제적 경쟁력 있는 극단’을 표방하고 있는 국립극단이 루마니아 연출가 펠릭스 알렉사를 기용해 세계 연극계에 가장 널리 공연되는 작가인 체홉을 색다르게 해석해 또 다른 도전에 나선 것이다. 원작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를 더욱 부각시키고 원작에 없는 오필리어의 독백까지 삽입해 극에 설득력을 더했다. 집이나 가구 등의 세트를 과감히 없애고 극장 시설 자체를 적극 활용한 모던한 무대로 꾸몄다. 최고의 배우 이혜영을 비롯해 오영수·이명행·이창직·박완규 등 가장 왕성하게 활동 중인 중견 배우들과 김기수·강주희 등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한 신인들까지 고루 포진해 완성도 높은 무대를 빚어냈다.

는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 극작가’로 불리는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홉의 대표작이다. 유명 여배우 아르까지나와 ‘새로운 연극’을 부르짖는 연출가이자 그의 아들 뜨레쁠례프, 배우를 꿈꾸는 소녀 니나와 유명 작가이자 아르까지나의 연인 뜨리고린의 얼키고 설킨 애증 관계를 축으로 예술과 인생, 이상과 현실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지만 이번 무대는 의미가 다르다. 최근 ‘빛의 제국’으로 프랑스에 진출하는 등 ‘국제적 경쟁력 있는 극단’을 표방하고 있는 국립극단이 루마니아 연출가 펠릭스 알렉사를 기용해 세계 연극계에 가장 널리 공연되는 작가인 체홉을 색다르게 해석해 또 다른 도전에 나선 것이다. 원작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를 더욱 부각시키고 원작에 없는 오필리어의 독백까지 삽입해 극에 설득력을 더했다. 집이나 가구 등의 세트를 과감히 없애고 극장 시설 자체를 적극 활용한 모던한 무대로 꾸몄다. 최고의 배우 이혜영을 비롯해 오영수·이명행·이창직·박완규 등 가장 왕성하게 활동 중인 중견 배우들과 김기수·강주희 등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한 신인들까지 고루 포진해 완성도 높은 무대를 빚어냈다.
아르까지나는 많은 걸 함축하고 있는 인물 같아요. “그동안 이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스스로 한물 가 버린 여인의 초상을 연기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분석한 아르까지나는 달라요. 예술에 도전했다가 좌절과 실패를 맛보는 젊은이들이 있지만 아르까지나는 그걸 다 경험하고 강하게 살아남은 거죠. 나도 마찬가지에요. 예술가의 삶이란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반항하는 아들과 속 썩이는 애인 사이에 있지만 독립적이고, 인생이란 그렇게 흘러가는 거라고 초월한 사람이죠. 지주계급이지만 농노계급과 가족처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요. 그게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고, 난 그런 아르까지나를 보여주려는 거예요.”


포스터의 미묘한 표정이 인상적인데요. “연습 시작 전에 찍었는데, 카리스마 있고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마냥 강하게 찍다가 잠깐 쉬는 중에 찍힌 컷이에요. 처음엔 좀 더 센 걸 골랐죠. 누구나 ‘이혜영’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로 정했었는데, 펠릭스가 결국 그걸 골랐어요. 이거야말로 아르까지나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무드란 거죠.”

연극 ‘갈매기’ 메인 포스터로 사용된 이미지

메인 포스터로 사용된 이미지
외국인 연출가에게 모욕적인 말 듣고 울기도 사실 ‘갈매기’는 희곡만 읽어도 아르까지나 역에 이혜영을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싱크로율이 높으니 그간 4차례나 역할 제안을 받은 게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모두 고사해 왔다. 1994년 김광림 연출의 연극 ‘집’을 할 때 극중 극으로 읊었던 니나의 독백에 엄청난 감동을 받아 오직 니나 역만 욕심이 났을 뿐, 아르까지나에 대해선 뻔한 역이라는 오해를 해왔던 탓이다. 이번에도 처음엔 아예 다른 작품을 하자고 역제안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그때 니나의 형편이었나 봐요. 지금도 그 대사를 들으면 눈물이 나요. 그 어린애가 성공이 다른 게 아니라 인내하는 거더라며, 처음엔 삼류였지만 이제 진짜 배우가 됐고 소명의식이 생겼다고 하죠.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배운지 이젠 느끼고 있다?는 그 말을 듣고 어느 여배우가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르까지나도 극중 “열다섯 소녀 역도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데, 니나에 대한 미련도 그런 마음인가요. “니나를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너무 멀리 왔을 뿐, 미련은 없어요. 그만큼이라도 경험했던 것이 다행이죠. 이젠 아르까지나만 보이는데, 펠릭스 연출이 아르까지나에게 오필리어 독백을 넣어준 게 너무 감사해요. 아들에게 옛날 연기 한다고 공격받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스크바의 대단한 여배우 아니냐, 연기 잘한다는 거 보여주라는 거죠. 그건 아르까지나와 동시에 나에게도 한 말이에요. 정말 네가 잘하고, 아르까지나도 진짜 괜찮다는 걸 보여주라는 거죠. 지금까지 어떤 아르까지나도 한 적 없는 장면이니 얼마나 새롭나요.”


그는 펠릭스 연출이 배우를 결코 편하게 두지 않는다고 했다. 익숙한 걸 낯설게 보게 하고, 경험 많은 배우들까지 초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윤택 선생 말고는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연출가가 없었어요(웃음). 배우를 황야에 던져놓고 작대기 하나 주면서 꽃으로 생각하라고 하는데, 맨 처음 윤복희 선생님 언더스터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하던 열아홉 데뷔 시절이 생각날 정도였죠. 그가 새로운 것을 줬다기 보단 내가 새롭게 느끼도록 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연극 ‘헤다가블러’(2012)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1995)

나이와 성 초월한 역할 하고 싶어 “누가 됐든 연출을 절대 신뢰한다”는 그의 태도는 어쩌면 천재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영화 ‘만추’가 거듭 리메이크되고, 지난해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만희 감독 40주기 기념전’을 열어 작품 26편을 상영할 만큼 반세기가 지나서까지 재조명 받는 위대한 예술가를 보고 자랐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정말 앞서간 사람임에 틀림없죠. ‘한국영화 역사는 이만희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한 시나리오 작가 백결 선생 말씀대로 영화적 언어에 그만큼 기여를 하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훈련받은 건 없어요.”


“어머니가 유명배우라는 게 싫다. 평범한 여자였다면 내가 더 행복했을텐데”라는 뜨레쁠례프 대사도 공감이 갈 것 같은데요. “그럼요. 난 아직도 ‘이만희의 딸’이잖아요. 이만희라는 예술가가 지금까지도 존재감이 살아있게 된 데는 주위의 희생이 컸어요. 아버지로선 용서할 수 없는 일도 많았죠. 불꽃처럼 모든 걸 희생시키고 홀로 빛나고 가셨으니까. 나는 피를 받았을 뿐 배운 게 없는데, 영화계에선 이만희 딸이 그렇게밖에 못하냐, 아버지에 비하면 너무 천박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아버지만 못한 2세’라는 열등감이 늘 있었어요. 어린 시절에 뭔가 다르단 걸 보여주려고 오버를 많이 했죠. 여배우로서 살아남기 위해 죽으면서도 속눈썹 붙이는 그런 여자가 아니란 걸 보여주려고요. 그런데 여배우가 절대 매력을 포기해선 안 되는 거더군요(웃음).”

악극 ‘눈물의 여왕’(1998)

그렇다면 ‘본능적 배우’임에 비해 활동이 뜸한 이유는 의식적으로 가정을 위해 배우로서의 인생을 희생하는 것일까. “전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엄마’로 살고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이다.


“저더러 예전엔 잘 웃더니 결혼하고 나서 웃음도 없어지고 얼굴도 더 길어졌다, 길어지니 더 우울해 보인다고 하더군요(웃음). 천만에요. 옛날엔 카메라만 보면 행복한 듯 웃었지만 사실 굉장히 슬펐어요. 지금은 카메라에 우울해 보일지 몰라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한 번도 희생이라 생각한 적 없어요.”


‘엄마’로서 행복하지만 배우로서 엄마 역은 별로란다. ‘나이와 성을 초월한 역할’이 탐난다고 했다. 국립극단에 ‘갈매기’ 대신 다른 작품을 제안했던 것도 “흔히 ‘아르까지나’하면 떠오르는 나이 든 여배우의 미래를 꿈꾼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의 ‘세인트 존’을 제안했었죠. 잔다르크 얘긴데, 잔다르크에 관해서는 희곡이든 소설이든 200여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버나드 쇼 버전을 읽었는데 딱 나더군요. 열일곱 잔다르크지만 ‘세인트 존’은 그녀의 오만한 정신세계를 그리고 있어요. 뤽 베송의 잔다르크를 본 사람은 그 아줌마가 어떻게 잔다르크를 하느냐고 하겠지만, 버나드 쇼의 잔다르크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 안 할걸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도 탐이 나요. 400년쯤 살면서 남자였다가 어느 날 여자로 바뀌는데, 그런 걸 할 수 있는 여배우가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 게 젊은 애들 전유물이고 늙은이들은 대충 뻔한 코스로 가는 게 아니라는 걸 꼭 보여주고 싶어요. 아직 증명을 못해 안타까울 뿐이죠.”

그런 그에게 여배우로서 5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내 삶이 연긴데 조바심 낼 게 뭐 있냐’는 초탈의 경지다. 4년 만에 컴백하면서 “연기를 쉰 적 없다”고 하는 것도 그래서다. “들어오는 역할이 거의 단순한 엄마나 할머니인데, 그런 ‘시(詩)’가 없는 곳에 가서 일할 바에야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 공연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영화·드라마에서 나를 얼마나 많이 찾는지 몰라요. 엄마도 엄마 나름이지만, 아르까지나는 그래도 ‘시’가 있죠. 이걸 안방에 갔다 놓으면 그 대사가 그 대사로 똑같겠지만, 우린 이걸 깊이 분석하니까. 이런 작업이 바로 ‘시’에요. ‘시’가 있냐 없냐의 차이가 너무 크거든요. 그래서 연극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극단·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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