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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47)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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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1 면

수원 화성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의 성곽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미래를 지향하는 선도도시로 만들려고 계획했다. 사진가 권태균

? 정조의 숙원사업은 사도세자 묘 이장이었다. 제왕(帝王)과 후비(后妃)의 무덤이 릉(陵), 왕세자나 세자빈 또는 왕비가 아니었던 국왕의 사친(私親) 무덤이 원(園)인데 사도세자의 경우 그보다 아래인 묘였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장헌(莊獻)세자,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렸다. 사도세자 묏자리는 정조뿐 아니라 어깨너머라도 풍수를 배운 사람이면 모두 문제 있는 형국(形局)이라고 여기는 자리였다.


그러나 영우원 이장을 시도하면 노론에서 의구심을 품을 것이었다. 자칫 정국이 파탄날 수도 있었고, 정도(正道)가 아닌 좌도(左道)를 신봉한다는 비난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고, 풍수가들도 노론의 눈치를 보면서 침묵했다. 이런 상태로 재위 13년이 흘렀다. 그러던 정조 13년(1789) 7월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면서 이 문제를 거론한 인물은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다. 그는 영우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박명원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넷이었다.


“첫째는 원소의 띠가 말라 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정조실록』 13년 7월 11일)”

만석거 범람하던 진목천의 물을 이용해 만든 저수지다. 만석거와 대유둔은 수원이 농업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박명원의 상소는 정조와 사전 교감 끝에 나왔을 개연성이 크다. 정조가 은밀히 기내(畿內)의 명당자리를 모두 간심(看審)한 지는 오래되었다. 정조가 염두에 둔 장지는 ‘수원 읍내에 있는 세 봉표지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곳’이었다. 정조는 이곳이 “옥룡자(玉龍子: 도선)가 말한 반룡농주(盤龍弄珠: 누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함) 형국이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는 곳”이라면서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이 수원의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으로서 용이 엎드렸다는 지명 자체가 명당의 뜻을 갖고 있었다. ? 정조는 이장지 백성들의 동의를 얻는 절차도 중시했다. 정조가 민심 획득을 위해 세운 원칙은 단 한 명의 백성도 이 문제로 불평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구체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첫째는 이주할 백성들에게 후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물론 더 살기 좋은 새 이주지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둘째는 백성들의 강제 부역을 금지하는 일이었다. 이주해야 할 백성은 약 200여 가구였다. 정조는 균역청의 돈 10만 냥을 수원에 떼어주어 이주비용으로 사용하게 하고 내탕금(內帑金: 국왕의 자금)까지 희사했다. 정조는 “내가 즉위한 이후로 한 번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힌 일이 없는데, 더구나 본원(本院: 영우원)에 관계된 일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조는 ‘털끝만 한 폐도 백성들에게 끼치지 않겠다’면서 영가(靈駕: 상여)도 백성들의 부역이 아니라 일꾼을 고용(雇用)해 운반하기로 했다.


? 정조는 사도세자의 새 안식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다. 대신들은 이로써 사도세자 묘 이장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정조에게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정조는 신도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 정조가 화성 신도시를 착공한 재위 18년(1794)은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환갑을 맞는 해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400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정조는 늦어도 사도세자가 칠순을 맞는 갑자년(1804)에 완공할 계획으로 착공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0년의 건설 기간을 잡은 셈이었다.


? 정약용의 연보인 사암(俟菴)선생연보에 따르면 정조는 재위 16년 부친상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수원성제(水原城制)’, 즉 화성 설계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정약용이 과거 한강 주교(舟橋:배다리) 설계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것을 기억한 것이다.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유성룡이 지은 성설(城設)을 참고해 성설(城設)을 작성해 올렸다. 정약용의 성설은 성의 크기에 대한 분수(分數), 길을 만드는 치도(治道), 성에 해자를 두르는 호참(壕塹) 등 여덟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설계도였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화성 건설과 관련해 단 한 명의 억울한 백성도 없게 하겠다’는 정조의 뜻에 따라 백성들의 강제 부역(賦役) 대신 임금 노동으로 건설하기로 한 점이다.


? 정조는 또 정약용에게 궁중에 비장한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 를 내려 주면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기계장치에 대해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도서집성은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든 백과사전이고, 기기도설은 스위스 출신의 선교사·과학자인 요하네스 테렌츠(J. Terrenz: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책으로 물리학의 원리와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각종 기계 장치에 관한 책이었다. 정약용이 기중기, 즉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기중기 설계도)을 만든 것은 이처럼 정조의 구체적인 지시와 자료 제공에 의한 것이었다.

만석거 범람하던 진목천의 물을 이용해 만든 저수지다. 만석거와 대유둔은 수원이 농업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정조는 화성 착공 1년 전(1793)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장용영이란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했다.? ? 화성은 ‘정조의 기획, 채제공 총괄, 조심태 실행’이란 3박자의 조화로 건설된 신도시였다. 화성은 사도세자 묘 이장이라는 정치적 성격의 도시였지만 정조는 그런 정치적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반대론을 잠재웠다.?


? 정조는 화성 성역을 통해 백성들이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할 생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조는 무더운 여름에 일꾼들이 쓰러질 것을 걱정해 어의(御醫)들과 상의해 ‘더위를 씻는 알약’인 척서단(滌暑丹) 4000정을 만들어 현장에 내려 보냈다.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정 또는 반 정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면 기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약이었다. 가뭄이 계속되자 정조는 7월 “일찍이 옛사람들이 오행(五行)에 부연시키는 말을 보면 ‘많은 백성을 수고롭게 부려서 성읍을 일으키면 양기(陽氣)가 성하기 때문에 가물이 든다’고 했다”면서 공사를 일시 중지시켰다. 신도시 건설이란 거대한 역사에 단 한 명의 백성의 원망도 없게 하면서, 가뭄까지 하늘의 조짐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국왕을 향해 반대론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정조에게 국정은 지극한 신앙의 실천 그것이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5호 2010년 7월 18일, 제176호 2010년 7월 25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416http://sunday.joins.com/archives/4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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