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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가상 인체로 키·보폭 계산…범인, 수학으로 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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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해 4월 20일 오후 3시, 30대 남성 K가 서울 A식당의 화장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벙거지를 쓰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전부 가린 채였다. 3초가량의 짧은 시간 동안 폐쇄회로TV(CCTV)에 포착된 그의 인상착의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며칠 뒤 K는 서울의 한 지하철역 입구 CCTV에 같은 차림새로 다시 등장했다. 불안한 듯 역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는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추적을 받는 간첩 용의자였다.

증언보다 강한 디지털분석 증거

“용의자가 출현한 시간은 몇 초에 불과하지만 수학적 분석으로 신체정보를 밝혀내기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 용의자 동작, 가상 인체에 입력
몸을 폈을 때 추정해 수치 분석
키 187.7, 보폭 91.4cm 알아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디지털분석과 문기웅(42) 연구관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생체인식 프로그램을 가동해 용의자 분석에 착수했다. 먼저 CCTV에 나온 공간을 3차원 그래픽으로 재현했다. 용의자가 발을 내딛는 지점, 무릎과 허리를 구부린 정도 등을 자세히 입력했다. 이후 가상 인체 골격을 화면에 배치했다. 용의자 대조를 위해 쓰이는 이 인체 골격은 국과수 연구관들 사이에서 ‘스켈리턴(skeleton)’이라고 불린다.

문 연구관은 스켈리턴의 관절을 일일이 조정해 용의자와 똑같은 자세로 설정한 뒤 같은 경로를 걷게 했다. 몸을 곧게 폈을 때의 키·보폭 등을 계산하기 위해서다. 30분 뒤 문 연구관이 입을 열었다.

“용의자는 키 1m87.7㎝, 평균 보폭은 91.4㎝입니다.”

국과수는 이 같은 간첩 용의자 K의 키·보폭 등 생체 분석정보를 경찰에 제공했고, K는 몇 달 뒤 검거됐다.

심규선(31) 국과수 공업연구사는 “3차원 그래픽 구현, 용의자의 키·보폭 분석 등엔 모두 행렬 등 수학 법칙이 입력된 디지털 분석 프로그램이 쓰인다”고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이 활용되는 분야는 생체정보, 번호판·CCTV·문서 감정 등 다양하다.

| 차 번호판도 수학 법칙으로 식별
개인정보 없는 간첩 수사에 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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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로 진입하는 중앙일보 취재 차량의 모습(위). 정면 각도로 재배치한 뒤 흐린 번호판을 복원했다.

‘모든 범죄는 수학 공식을 벗어나지 못한다’가 국과수 디지털분석과의 모토가 된 이유다.

생체인식은 최근 대공 간첩 분야에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다. 수사기관에서 기본적인 개인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국내 용의자와 달리 간첩 용의자는 정보가 전무하다. 기본적인 신체정보가 소중한 증거가 된다. 살인·절도 등 형사사건에서도 생체인식은 널리 쓰이고 있다. 같은 기간 국과수가 생체인식으로 분석한 형사사건은 3056건이다.

생체인식 프로그램은 인상착의 확인이 불가능한 범인 검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지난해 3월 인천 지역의 아파트를 돌며 5억3000만원을 훔친 A씨(35)는 범행 당시 가발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해 수사에 혼선을 줬다. 하지만 국과수는 CCTV에 포착된 하반신을 단서로 용의자를 특정했다. A씨의 무릎 위치가 보통 사람보다 4㎝ 위에 있음을 분석을 통해 밝혀낸 뒤였다.

2013년 인천 모자 살인사건의 범인도 디지털 분석의 올가미에 걸렸다. 당시 피의자 정모(29)씨는 어머니와 형을 살해한 뒤 자신의 차량 트렁크에 시신을 넣어 유기한 혐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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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측면 사진을 토대로 3차원 얼굴 을 구현한 모습(위). 아래 오른쪽은 기자의 실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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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는 CCTV에 포착된 정씨의 차량과 동일한 차종으로 타이어나 차체의 가라앉음 정도를 실험했다. 정씨 차량의 상태가 시신 둘의 무게인 125㎏을 적재하고 이동했을 때와 동일하다는 게 밝혀졌다.

이중(49) 디지털분석과장은 “0.1㎝ 단위까지 분석·규명이 가능한 디지털 분석 자료는 목격자의 증언, 용의자의 진술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ongang.co.kr
[사진·영상 김우진·최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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