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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 사회문제 아닌 주변 얘기…영화·게임·뉴스서 영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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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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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물에서 판타지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악의 근원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의 거장 미야베 미유키. 그의 소설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악에 말려드는 ‘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깔려 있다. [사진 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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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단계 사기사건에 연루된 노인이 버스를 납치한다(『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에도 시대, 식인괴수가 나타나 마을을 괴멸시킨다(『괴수전』). 중학생 소년소녀가 아름다운 고성이 그려진 그림 속을 탐험한다(『사라진 왕국의 성』). 지난해와 올해 한국에서 출간된 일본 미스터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56)의 작품 목록이다.

세계의 이야기꾼을 찾아서<3>
‘미스터리소설 여왕’ 미야베 미유키

수백년 전 과거에서 지금 이곳까지, 사회성 뚜렷한 미스터리에서 판타지까지, 시대도 장르도 제각각이다. 공통점은 일단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렵다는 것. 일본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믿고 보는 작가’로 통하는 미야베는 한국에서도 ‘미미여사’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최근작인 『사라진 왕국의 성』은 따뜻한 감성의 미스터리 판타지다. 고교 진학을 앞둔 주인공 신이 우연히 유럽풍의 고성 그림을 손에 넣게 되고, 그림에 자신의 분신을 그려 넣으면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단 걸 알게 된다. 미술에 재능 있는 같은 반 여학생의 도움으로 그림 속에 들어가게 된 신은 고성 안에 갇힌 소녀를 발견하고 그를 구해낼 계획을 세운다. 시간이동, 평행세계 등 다양한 SF적 설정 속에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라는 현실의 문제가 녹아든다. 한국판 출간을 계기로 미야베 작가와 e메일 인터뷰를 했다.

| 한국영화‘괴물’보고 『괴수전』 써
공원 산책하며 판타지 구상도
난 박해일 팬, ‘제보자’ 보고 감동

그림 속 ‘이세계(異世界)’를 탐험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워낙 TV 게임을 좋아하다보니 ‘아바타(분신)’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현실 세계와 그림 속 세계의 관계는 겨울에 쓸쓸한 공원을 산책하다 나온 아이디어다. 당초엔 좀 더 판타지 색채가 강한 작품을 생각했는데, 완성하고 보니 훈훈한 미스터리가 되어있었다.”
평범한 중학생이 주인공인데.
“이 소설의 설정처럼 ‘과거(그림 속)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나를 바꿀 수 있다면’이란 상상을 해 봤다. 나야 50년을 넘게 살았으니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도 귀찮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만(웃음). 아직 틴에이저라면, 과거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할 거라 생각했다. 선택 하나하나가 먼 미래의 자신을 좌우하게 되니까.”
아동 학대라는 사회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특정 사건에서 소재를 얻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일본에서는 가정 내 아동학대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무척 슬픈 일이다.”
주인공들처럼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아르놀트 뵈클린의 그림 ‘죽음의 섬’에 들어가보고 싶다. (무서운 그림이라) 그 섬을 멀리서만 보고, 즉시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만(웃음).”
아이들이 그림 속에서 만나는 중년 남자 파쿠(パク)씨는 유명 만화가의 어시스턴트다. 모델이 있는지.
"모델은 없다. 난 만화를 잘 모르지만 '원피스'나 '암살교실' '테라포마스' 등은 읽고 있는데 너무너무 재미있다."
일본판 표지에 그려진 아름다운 성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이 그림은 일본에서 '겨울왕국 칠판그림'으로 유명해진 '레나레나'라는 예명의 고등학생이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그렸다. 한국에서는 한정판 표지로 제작됐다)
"레나레나씨가 그려준 칠판아트의 장면은 정말정말 멋있었다. 색교정 단계의 프린트를 출력해 지금도 사무실 보드에 붙여놓고 있다. 소설 속의 성 이미지를 멋지게 넘어서 이야기를 더욱 깊이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사라진 왕국의 성』 책 표지 그림(칠판 그림)을 그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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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뵈클린 ‘죽음의 섬’ 1833년, 베를린내셔널 갤러리 소장.

| 국내서‘미미여사’로 불리는 인기작가
『화차』『모방범』 등 60여 편 출간
최근 『사라진 왕국 …』 한국판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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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는 1960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률 사무소에 다니다 미스터리 소설 학원에서 습작을 시작, 1987년 ‘우리 이웃의 범죄’로 올요미모노추리소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다. 이후 ‘전후 엔터테민먼트 문학계에 느닷없이 나타난 귀재’로 불리며 지금까지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평범한 사람이 거대한 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치밀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한국 영화로도 만들어진 『화차』(1992)는 신용카드와 대출이라는 덫에 걸린 여자의 비극을 그렸고, 120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이유』(1998)는 부동산 버블 붕괴가 불러온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뤘다. 『모방범』(2001)은 살인을 ‘기획’하는 사이코패스가 주인공이다. 미야베는 “악은 어디서 오며 어떻게 전염되는가가 내 소설을 관통하는 테마”라고 했다.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불리는데.
“스스로는 전혀 ‘사회파’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내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에 관심을 갖는 편이다. 단,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적어도 뉴스 정도는 꼼꼼히 챙겨보려 한다.”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괴수전』을 썼을 정도로 한국영화 팬이라고 .
“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어떤 영화보다 변영주 감독의 ‘화차’가 좋았다. 가장 최근에는 줄기세포 논문 위조 사건을 다룬 영화 ‘제보자’를 보고 감동했다. 주인공 방송기자를 연기한 박해일씨의 팬이기도 하다.”
미스터리 작가의 일상은 어떤지 궁금하다.
“놀라울만큼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해 계획한 양만큼의 글을 쓰고 나면 책을 읽거나 쉰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입체 피크로스2’라는 게임에도 빠져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사라진 왕국의 성』 주인공들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은 사람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때와 비슷하다. 나 역시 소설을 쓸 때는 독자들을 이세계 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시대물 미스터리를 쓰고 있다.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이은 ‘스기무라 사부로(탐정 이름)’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 일본에서 6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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