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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通新 사용설명서] 남녀 대결이 아닌 모두의 안전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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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토요일 밤 강남역에 가봤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쪽지와 꽃다발이 가득했습니다. 한데 주변은 금방이라도 몸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여성 혐오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피켓 시위와 살인사건을 남성의 탓으로 몰지 말라는 남성들 간의 말다툼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지난주 살인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 제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건 술집이나 카페의 화장실에서 수없이 봤던 으슥한 남녀 공용 화장실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두운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곳에서 나처럼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온 남자와 마주칠 때마다 긴장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얼마 전 인터뷰했던 건축가 곽희수의 말도 떠올랐습니다. 그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열쇠 받아서 화장실 가는 가게다. 임대 수입을 늘리기 위해 많은 건물주가 공간을 잘게 쪼개고 화장실을 밖으로 빼는 구조를 요구하는데 그것만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계약이 파기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남녀 공용 화장실이든 남녀 구분된 화장실이든 건물 밖 외진 곳에 설치된 공용 화장실을 이용하는 건 여전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이번 사건을 남녀 간의 성 대결로 몰아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일베’나 여성 비하 발언을 쏟아내는 일부 남성들에 동조해서가 아닙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이런 흉악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커버스토리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도시의 안전을 돌아봤습니다. 특히 여성이 두려움을 느끼는 도시 곳곳의 모습을 박미소 기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춰 돌아보고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이번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건 여성이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라서입니다. 바로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두려움이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범인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혐오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안전한 도시 만들기가 이뤄져야 합니다. 한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가 벌인 단순 살인사건으로 끝나선 안 됩니다.

박혜민 메트로G팀장 park.hy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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