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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한국·이란 경제협력 만든 ‘천년의 인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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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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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훈
수출입은행장

파리둔(Faridun), 7세기 이란에서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페르시아를 복원시킨 이란의 민족영웅이다.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의 어머니는 신라의 여인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왕족이던 아브틴이 아랍의 침략세력을 피해 중국을 거쳐 신라까지 들어온 후 파라랑 공주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 파리둔이란 게 쿠쉬나메의 주 내용이다. 페르시아 민족영웅의 외가(外家)가 동아시아 맨끝자락 신라였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외갓집이 주는 포근함 때문일까. 대장금·주몽같은 한국 드라마 시청률이 이란 현지에서 80~90%를 넘나드는 것도, 1973년 석유파동 당시 이란이 유일하게 한국에 원유를 공급해준 것도, 서울 테헤란로와 이란 서울로가 조성된 것도 어쩌면 두 나라가 1300여년전 유전자를 나눴던 정서적 교감에서 발로된 것인지도 모른다.

6년간 굳게 잠겨있던 이란의 빗장이 풀렸다.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낀 한국으로선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다. 이달 2일 필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이란땅을 밟았다. 테헤란 곳곳에 걸린 한국 관련 현수막이 눈길을 잡아끌었고, 현지 언론들은 일제히 우리의 방문소식을 다루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양국관계의 터닝 포인트가 된 이번 방문에서 한국과 이란은 모두 66건의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이란의 인프라 건설과 에너지사업부문에 한국기업의 수주 발판 조성이란 성과를 거뒀다.

30개 프로젝트에서 체결한 양해각서와 가계약 등으로 한국이 확보한 수주 가능 금액은 총 371억 달러에 이른다. 앞서 양국간 무역규모는 2012년 약 150억 달러에서 2015년 약 61억 달러로 급감한 상황이었다.

이란이 현재 가스·전력·철도·도로 등의 분야에서 노화화된 인프라 개선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만큼 향후 한국과의 동반자적 협력관계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물론 두 나라가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이익이 전제되어야 한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공군기의 사업현장 폭격에 대림산업 직원 10여명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 회사측은 이란을 떠나지 않고 공사를 끝까지 마무리지었다. 묵묵히 약속을 지킨 대림은 이번 방문에서 총 72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 가계약을 체결해 사실상 수주를 목전에 두고 있다.

국제사회의 오랜 제재 탓에 재정이 어려워진 이란은 대규모 건설·플랜트사업 등을 발주할 때 한국에 금융조달을 요구할 것이다. 정책금융기관의 지원이 해외수주의 선결 조건이 된 이유다. 수은은 금융이 없어서 우리 기업이 이란 수주를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할 것이다. 봄이 깊어지고 있다. 마지막 교태를 부리는 봄꽃들의 농익은 군무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천년 넘어 부활한 아브틴과 파라랑의 사랑이 한-이란 경제협력으로 결실을 맺는 것에 단단히 시샘이 난 듯 말이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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