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트북을 열며

생사 걸린 화장실 혁명

중앙일보

입력 2016.05.23 00:34

업데이트 2016.05.23 15:59

지면보기

종합 30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사 이미지

장세정
지역뉴스부장

이달 초 중국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을 여행하던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들렀다. 소변기 앞에 서니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변기) 앞으로 작은 한 걸음 다가서면 문명사회의 큰 걸음을 내디딘다(向前一小步 文明一大步)’는 내용이었다. 화장실문화시민연대(상임대표 표혜령)가 국내 화장실에 보급해온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리게 했다. 10여 년 전 네이멍구(內蒙古)를 여행할 때 변소 수준의 화장실 때문에 ‘대략난감’ 했는데 최근 중국에 ‘화장실 혁명’이 진행 중이라 인상적이었다.

한국 화장실 혁명의 대표적 주역은 고인이 된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다. 그는 1999년 10월 한국화장실협회를 설립하고 수원의 공공화장실을 세계적 모범 사례로 만들었다. 2007년에는 세계화장실협회(WTA)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살던 집을 허물고 양변기처럼 생긴 해우재(解憂齋)를 지었다. 2009년 전립샘암으로 별세하자 유족이 해우재를 기부했고 수원시가 ‘화장실 문화 전시관’으로 개방해 명소가 됐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WTA 3대 회장을 맡아 아시아·아프리카에 화장실을 지어주고 있다. 박수받을 일이다.

그러나 국내 화장실 혁명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호텔급 화장실과 후진적 남녀공용 화장실이 뒤섞여 있어 ‘화장실 양극화’가 심각하다. 지난 17일 서울 강남역(서초구 관할) 10번 출구 쪽 노래방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살인 사건을 봐도 그렇다. 경찰은 22일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라고 발표했지만 남녀 공용화장실이 범죄의 무대를 제공한 사실은 분명하다. 남녀 공용화장실의 폐쇄가 시급한 이유다.

현행 공중화장실 관련법은 2006년 11월 9일 이후 신축된 연면적 2000㎡ 이상 상가, 3000㎡ 이상 업무시설에만 남녀 화장실 구분 설치를 명시하고 있다. 현행법이 화장실을 범죄 사각지대로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공간이 부족하면 우선 1, 2층을 남녀로 구분해 사용하자. 근본적 대책도 필요하다. 유동인구가 몰리는 지역에 공용주차장을 많이 짓듯 자치단체들이 남녀 분리 공중화장실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휘발성 강한 문제는 또 있다. 3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가 성전환자(트랜스젠더)는 출생증명서에 기록된 성별에 따라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도록 법안을 제정하면서 ‘화장실 성소수자 차별’ 논란이 불붙었다. 그 불이 한반도에도 상륙할 기세다. 사회적 갈등으로 폭발하기 전에 대책을 궁리해야 할 문제다.

‘미스터 토일릿(Mr. Toilet)’으로 불렸던 심재덕 전 시장은 생전에 “26억 명이 화장실 없이 생활하고 연간 200만 명이 수인성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화장실은 인류의 생명을 지키는 성소(聖所)”라고 역설했다. 원초적 근심이 쌓이면 분노가 된다. 모두의 근심을 풀어주고 생명을 살리는 해우소(解憂所)가 될 때까지 화장실 혁명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장세정 지역뉴스부장

모비온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