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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강남역 살인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김씨 "난 여성혐오 아냐"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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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경찰이 강남역 인근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20대 여성 살인사건을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규정했다. 한편 사건 피의자는 경찰조사에서 “여성 혐오나 반감이 없고, 여성에게서 실제적인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22일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브리핑을 열고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모(34ㆍ구속)씨에 대한 심리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지난 19~20일 권일용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경감) 등 5명의 프로파일러를 투입해 2차례에 걸쳐 김씨와 면담을 갖고 심리분석을 진행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2003~2007년 사이에 성별에 관계없이 “누군가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주변인들에게 말하는 등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다. 또 앞서 청소년기부터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등 이상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씨는 2008년 병원에서 조현병(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고, 총 6차례 정신과에 입원해 치료 받았다.

경찰은 “2008년 이후부터는 1년 이상 씻지 않는 등 기본적인 자기관리 기능이 손상된 상태였다”며 “하지만 김씨는 자신의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올해 1월초 퇴원 후에는 약물 복용을 중단했고, 범행당시는 망상이 심해졌던 상태”라고 설명했다.

경찰 분석 결과 김씨의 이런 피해망상은 2년 전부터 “여성들이 자신을 견제하고 괴롭힌다”는 내용으로 변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가 2년전 신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추진력 있게 일을 하려하는데, 여성들이 나를 견제하고 괴롭힌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김씨가 범행을 결심한 계기에 대해 “지난 5일 서빙업무를 하던 식당에서 위생이 불결하다는 지적을 받고 7일부터 식당 주방보조로 옮겼는데, 이를 여성이 자신을 음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범행을 일으킨 배경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직접 위생상태를 지적한 사람은 없지만, 김씨는 여성들이 뒤에서 자신을 음해해서 주방으로 옮기게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경찰과의 면담에서 “나는 일반적인 여성들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고 여성 혐오자도 아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때도 있었고, 날 좋아한 여자도 있었다. 다만 여성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 김씨는 인터넷 상에 있는 여성혐오 현상에 대해 “어린 사람들의 치기 어린 행동인 것 같고, 나는 그런 이들과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씨가 ‘실제적인 피해’라고 예를 든 사례는 “지하철에서 어깨를 치고 가는데 보니까 다 여성이었다”, “지하철에서 여성들이 내가 지각하게 하려고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앞을 가로 막는다”, “여성들이 담배꽁초를 일부러 나에게 던진다” 등이다. 김씨는 “사소하지만 기분 나쁜 일들은 다 참아왔는데, 직업적인 부분에서까지 음해를 하니 더 이상 못 참겠다고 느꼈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이렇게 있다가는 내가 죽을 거 같아서 먼저 내가 죽여야겠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김씨의 이런 주장들을 명확한 근거나 사례가 없는 피해망상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막연한 느낌과 생각을 확고하게 믿고, 피해를 받았다고 말하는 등 ‘내 느낌이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다’는 식으로 진술한다”며 “표면적 범행동기나 피해자와의 직접적 관계 없이 망상적 사고를 갖고 범행을 저지른 점을 볼 때 이 사건은 ‘묻지마 범죄’ 중 조현병 유형”이라고 밝혔다.

또 “바로 다음날에도 도주하거나 증거인멸을 하는 대신 식당으로 출근하다 검거됐고, 검거에 대한 현실적인 계획이나 대비가 없는 등 목적에 비해 계획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점 역시 묻지마 범죄의 특성”이라고 경찰은 덧붙였다.

‘여성 혐오 범죄’와 ‘정신질환’ 범죄의 구분에 대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경찰 관계자는 “여성 혐오 등 증오범죄와 정신질환 범죄는 따로 구분되는데, 범죄학적으로 정신병으로 인해 특정 집단에 피해망상 등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은 증오범죄에 속하지 않는다”며 “예를 들어 ‘특정 민족이 우리나라에 와 우리나라를 망친다’는 망상에 빠져 해당 민족 사람 3명을 살해한 정신질환자의 범죄는 정신질환 범죄지 ‘인종 혐오’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김씨의 범행 역시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닌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한편 김씨는 지난 17일 0시 33분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의 남녀공용 화장실에 들어가 있다가 약 30분 뒤인 오전 1시 7분 화장실에 들어온 첫 여성인 A(23)씨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은 “평소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했다”는 김씨 진술을 언론에 공개했고, 김씨가 화장실에 대기하면서 남성 6명은 그냥 보낸 사실이 전해지면서 ‘여성혐오 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피해 여성에 대한 추모열기가 확산됐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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