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살균제는 복지부, 소독제는 환경부…“옥시 사건 언제든 재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기사 이미지

임신 6개월의 전업주부 ‘나화학’씨는 19일 샴푸로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식사 뒤 주방용 세제로 설거지를 했다. 이어 섬유유연제·표백제를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 후엔 집안 청소를 했다.

기사 이미지

세정제를 뿌려 욕실 바닥을 닦고 옷장마다 전날 사놓은 습기제거제도 바꿔 넣었다. 오후엔 아파트 단지를 산책했다. 자외선차단제 바르는 걸 빠뜨리지 않는다. 고교 동창 저녁 모임에 입고 나갈 옷에 탈취제를 뿌렸다. 세정제에 담가 보관하는 콘택트렌즈도 꼈다.

기사 이미지

모임에 도착한 나씨는 가방에서 손소독제를 꺼냈다. 지하철에서 잡은 손잡이가 찜찜해서다. 귀가 후 치약으로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엔 구강청결제로 입을 헹궜다.

화학물질 유해성 평가는 환경부
제품 관리는 5개 부처 따로따로
화학제품 24시간 둘러싸여 사는데
책임소재 불분명, 효율적 관리 안 돼
EU는 1998년부터 통합관리 나서

나씨는 하루 종일 화학제품에 둘러싸여 있다. 그가 이날 쓴 제품은 모두 12가지. 일상은 화학제품 소비로 이뤄진다. 하루 소비한 제품의 용기에 적힌 성분 정보는 제각각이다. 나씨가 사용한 샴푸엔 소듐라우레스설페이트를 포함해 28개 성분이 명시됐다. 옷에 뿌린 탈취제엔 물·건조제·탈취제 등 여덟 가지가 기재됐을 뿐 성분명은 하나도 없다. 습기제거제는 주요 성분인 ‘염화칼슘’ 하나만 화학물질 성분을 적었다.

사정이 이런 것은 제품별로 담당 부처가 다르고 공개 의무 여부도 제각각이어서다. 화장품은 전체 성분을 공개하게 돼 있다. 습기제거제 같은 공산품은 성분을 담당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 보고하거나 제품에 공개할 의무가 없다.

화학제품 중 상당수엔 사람이 원치 않는 세균·곰팡이를 죽이거나 억제하는 물질인 살생물제, 이른바 바이오사이드(Biocide)가 들어 있다. 연세대 양지연(보건학) 교수는 “살균·멸균·항균 기능을 표방하고 있다면 바이오사이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기사 이미지

나씨가 이날 쓴 제품 중 주방용 세제·표백제·욕실세정제·습기제거제·콘택트렌즈 세정제·손소독제·구강청결제 등 7가지가 이에 해당됐다. 바이오사이드 제품은 허용 물질이라도 함량 기준을 초과하면 인체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화학물질의 유해성·위해성에 대한 평가는 환경부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 물질이 들어간 제품에 대한 관리는 여러 부처에 나뉘어 있다. 바이오사이드에 대한 관리는 보건복지부(살균제·살충제), 환경부(소독제), 농림축산식품부(농약), 해양수산부(방오제), 산업통상자원부(습기제거제) 등 다섯 개 부처에 흩어져 있다. 유럽연합이 1998년 ‘살생물제 관리지침’을 만들어 통합 관리를 해온 것과 대조적이다.

박정규 한국환경정책평가원 선임연구원은 “살생물제를 여러 부처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고, 관리 기준도 통일되지 않아 안전 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환경부 규정은 엄연한 바이오사이드 제품을 바이오사이드 제품이 아닌 것으로 오해될 여지마저 제공한다. 환경부가 지난해 4월 만든 ‘위해우려제품 지정 및 안전·표시에 관한 기준’에서 위해우려제품 15종 중 소독제·방충제·방부제만을 ‘살생물제류’로 명명 했다. 하지만 탈취제·방향제 등 나머지 12종에 속한 제품도 살균·멸균 등의 기능이 있으면 살생물제 제품에 해당한다.

이런 구조에선 제2, 제3의 가습기 살균제(옥시싹싹 뉴 가습기당번 등) 사건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발생하자 환경단체 와 연구자들은 ‘바이오사이드를 통합 관리해야 한다’고 꾸준히 지적했다. 하지만 환경부는 ‘화학물질 중 정부에 등록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물질을 지정하고, 위해성 우려가 높은 공산품은 환경부가 관리한다는 내용으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을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박종원 부경대 법학과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서 보듯 위해성 높은 물질을 포함한 신제품이 공산품으로 출시돼 실제 피해가 발생한 이후에야 위해우려제품이나 의약외품으로 지정되는 현실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현재의 사후 보완 시스템에선 새 유형의 제품은 출시 전 단계에서 유해성 등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고 했다.

성시윤·강기헌·황수연 기자 sung.siyo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