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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해운대 16분…영화 속 ‘순간이동’ 현실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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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한 장면. 비밀 요원 해리(콜린 퍼스)는 에그시(태런 에저턴)를 데리고 양복점 ‘킹스맨’의 피팅룸으로 들어간다. 해리가 거울에 손을 대자 피팅룸은 대형 엘리베이터로 변해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문이 열리자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캡슐 모양의 열차. 빈자리에 앉자 열차는 순식간에 지하 기지를 향해 달린다.

[궁금한 화요일] 하이퍼루프 첫 시험주행 성공

| 1.1초 만에 시속 187㎞로 가속 성공
미 개발업체 “올해 말 실물 보여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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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탑승한 캡슐 모양 열차는 초고속 이동수단 ‘하이퍼루프(Hyperloop)’를 연상케 한다. 하이퍼루프는 ‘가상(hypothetical)의 공기주행 기계(air travel machine)’를 뜻하는 말이다. 인터넷 결제 업체 페이팔, 상업 우주선 업체 스페이스X, 그리고 전기차 업체 테슬라 모터스를 창업한 일론 머스크가 2013년 논문을 통해 제시한 이상적 교통수단의 모델이다.

이런 영화 속에 등장한 ‘꿈의 교통수단’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미국의 하이퍼루프 개발 업체인 하이퍼루프 원(전 하이퍼루프 테크놀로지)은 11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북부 사막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하이퍼루프 추진체의 첫 시험 주행에 성공했다. 추진체는 1.1초 동안 시속 187㎞의 속도를 냈고 최고 속도는 483㎞까지 치솟았다. 현존하는 어떤 지상 운송 수단보다 가속 성능이 빠른 셈이다. 시험 주행은 3㎞의 트랙에서 총 2초간 이뤄졌다.

롭 로이드 하이퍼루프 원 최고경영자(CEO)는 “머스크의 머릿속에 있던 흐릿한 아이디어가 현실이 됐다. 올해 말에는 실물의 하이퍼루프를 보여주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 서류 전송 ‘에어슈터’에 영감 받은
‘테슬라’ 머스크의 아이디어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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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가 처음 하이퍼루프를 떠올린 것은 빌딩 내 사무실에서 서류를 전송하는 ‘에어슈터’를 보고 나서다. 미국의 비즈니스 건물에서 흔히 사용하는 에어슈터는 서류나 우편물 같은 간단한 짐을 나를 때 쓰인다. 사무실과 사무실 사이에 속이 비어 있는 관을 설치하고 그 안에 운반통을 넣어 둔 간단한 구조다. 공기 압력을 가해 운반통을 밀어내는 방식이다.

머스크는 에어슈터처럼 튜브 안의 공기를 초고속으로 밀어내 객차를 이동시키는 교통수단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공기 저항이 커서 실용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안하기 위해 생각한 것은 튜브 안을 진공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고 자기 부상력을 이용해 열차를 움직이는 방법이다. 서로 다른 극끼리 끌어당기고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는 자석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이 방식을 이용하면 진공 속에서 30t 무게의 캡슐을 1분 내에 시속 1200㎞ 이상으로 가속시킬 수 있다.

진공터널을 이용한 초고속 이동 시스템을 구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 아니다. 1972년 물리학자 R M 솔터는 진공 상태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초고속 이동 시스템(VHST)’이란 주제의 논문을 펴냈다.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ET3는 현재 솔터가 제시한 원리를 바탕으로 초고속 이동 시스템(ETT)을 개발하고 있다. 6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캡슐에 전기 모터를 달아 진공 터널로 이동시키는 개념이다.

ET3는 평균 시속 600㎞, 최대 시속 6500㎞까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머스크는 ET3가 개발하고 있는 방식이 기본적으로 옳지만 기술적으로 몇몇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이퍼루프의 상용화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 머스크의 주장이다.

| 시속 1300㎞로 여객기보다 빨라
동력·자기부상 기술 속속 인증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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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현지시간) 시험 주행 계획을 밝히는 하이퍼루프 원. [사진 하이퍼루프 원]

하이퍼루프는 최대 시속 1300㎞, 평균 시속 960㎞의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여객기 평균 시속 900㎞보다도 훨씬 빠르다.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가 운항을 중단한 이후 현재 음속으로 이동하는 교통수단은 하나도 없다. 하이퍼루프가 개통하게 되면 지금 하늘에도 없는 유일한 초음속 교통수단이 된다. 인류 최초로 육상에서 초음속을 실현하는 교통기관이라는 기록도 세우게 된다.

비행기보다 두 배 빠른 하이퍼루프를 타면 로스앤젤레스(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35분 이내에 주파할 수 있다. 두 곳은 614㎞ 떨어진 거리로 자동차를 타면 6시간이나 걸린다. 서울시청에서 부산 해운대까지는 16분 만에 갈 수 있 다. 머스크는 하이퍼루프가 항공기·기차·자동차·배를 잇는 ‘제5의 교통수단’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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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라스베이거스 북부 사막에 튜브를 설치하는 모습. [사진 하이퍼루프 원]

친환경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캡슐이 이동하는 튜브 위에 태양 전지판을 붙여 전기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기는 자기 부상과 압축공기 분사, 모터 가동 등에 쓰게 된다. 운행에 많은 동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운영에는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머스크는 하이퍼루프가 가동될 경우 1인당 이용비는 약 20~30달러 선에서 책정될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많은 기술자가 하이퍼루프 개발전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하이퍼루프 트랜스포테이션 테크놀로지(HTT)는 10일(현지시간) 하이퍼루프의 동력 제공과 수동 자기부상에 관한 기술을 인증받았다고 밝혔다. HTT는 하이퍼루프 개발을 위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보잉의 전문 기술진이 모여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설립된 신생 업체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팀은 머스크가 운영하는 스페이스X의 지원을 받고 있다. NASA 와 손잡은 스카이 트랜도 기술 개발에 한창이다. 스카이 트랜은 최근 최대 4명이 탑승 가능한 차량 기술을 발표하고 이를 위해 약 50㎞ 트랙을 나이지리아에 건설하기로 했다. 기술은 이미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자금 확보 등이 시장 선점의 관건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이퍼루프 원은 GE벤처스, 프랑스 국영철도 등으로부터 1억 달러(약 1170억원) 이상의 투자를 받은 상태다.

| “초음속 밀폐공간 대형사고 우려 커”
안전성, 천문학적 건설비가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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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시험 주행 중인 하이퍼루프 추진체. [사진 하이퍼루프 원]

하이퍼루프가 새로운 기술로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 안전성은 담보되지 않은 상태다. 기술 전문가는 “튜브 내 공간을 초음속으로 달리기 때문에 사고 발생 시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비밥 그레스타 HTT 최고운영책임자(COO)는 “하이퍼루프는 전력 공급이 중단돼도 공중부양 상태로 속도만 낮춘다”며 “안전 면에서 하이퍼루프가 오히려 유리하다”고 밝혔다.

응급 상황에 대한 우려도 있다. 진공에 가까운 튜브 안을 밀폐된 상태로 운행하기 때문에 탑승자들이 폐쇄공포증이나 호흡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환자 이송을 위해 역이 아닌 곳에 비상 정차했을 경우 튜브를 철거하느라 시간이 지체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과도한 기반시설 건설 비용도 문제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튜브 건설에만 60억 달러(약 7조398억원)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하이퍼루프 개발 업체들은 저렴한 운영비가 초기 투자비용을 상쇄한다고 주장한다.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운행하기 때문에 설비가 마모될 우려가 적어 수리비도 적게 든다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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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루프가 개발자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미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형식 한국기계연구원(KIMM) 박사는 “미국에서는 그동안 LA와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벤처캐피털이 발달해 있어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도 기술자들이 하이퍼루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하이퍼루프에 대적하는 신기술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에선 지난해 리니어 신칸센이 시험 철로에서 시속 603㎞의 대기록을 세웠다. 2007년 프랑스 TGV가 이룬 시속 574㎞의 기록을 경신한 순간이었다. 이 열차는 앞으로 일본 차세대 철도 노선인 리니어 신칸센 구간을 운행하게 된다.

리니어 신칸센은 기존 신칸센과 달리 레일 위가 아니라 열차 차체와 노선 측면에 각각 설치된 초강력 전자석의 반발력을 이용해 지면에서 10㎝ 정도 뜬 채 운행하게 된다. 바퀴와 레일 사이의 마찰력이 없어 시속 500㎞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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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신칸센은 도쿄~오사카의 545㎞ 거리를 2시간33분에 달리고 있는데 리니어 신칸센은 같은 구간을 54분 만에 주파하게 된다. 음속의 60%에 이르는 엄청난 속도다. 문제는 이 정도 고속에서도 안전하게 운행을 계속할 수 있느냐다. 일본이 이런 기술을 확보하면 전 세계 철도 시장에 새로운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에선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2298㎞ 거리의 이동시간을 기존 20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인 고속철이 운행 중이다. 상하이 푸둥공항에서는 비록 단거리지만 자기부상 열차가 상업적 운행을 하고 있다. 두 가지 기술이 결합한다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모른다. 이제 세계는 고속전철을 넘어 음속에 육박하는 초고속 교통수단의 경쟁 시대로 다가가고 있다.

김경미 기자 gae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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