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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②] 퇴계 선생의 ‘손주교육’에서 배운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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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와 손자녀의 관계 새로 설정해야… 고령화와 청소년 인성 문제의 해법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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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류 이상의 가정’이란 제목이 붙은 구한말 양반가 사진. 손자를 안은 할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진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할매할배의 날’로 제정해 운영 중인 경상북도가 최근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북 할머니·할아버지 10명 중 6명은 손주를 돌볼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경북도는 지난해 11월 포항·청도 등 9개 시·군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만나 손주교육 의식을 조사했다.

군자는 손자를 품에 안아도 아들을 안지는 않는다!

이 결과 ‘손주를 돌볼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611명(61.1%)이 ‘양육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또 136명(13.6%)은 ‘양육 부탁을 실제로 거절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거절 사유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54.4%), ‘내 시간을 갖고 싶어서’(30.1%), ‘다른 자녀도 부탁할 것 같아서’(4.4%)의 순이었다.

이번 조사에서 그래도 155명(15.5%)은 ‘현재 손주를 돌보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이들 가운데 31.2%는 ‘내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돌본다고 답했다. 전통적인 조손(祖孫)의 관계가 아직은 남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할머니·할아버지와 손자·손녀 관계. 오늘날 청소년 인성(人性)과 노인문제 등의 해답을 전통적인 조손 관계의 회복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어찌 보면 조손 교육은 50∼60년 전만 해도 자연스러웠고 선현들도 실천했던 방식이다.


퇴계 16년간 편지로 손자를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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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손자에게 “자식을 살리려고 여종의 아이를 죽게 하지 말라”며 보낸 편지.

 대표적인 인물이 퇴계 이황(1501∼1570)이다. 퇴계는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안동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매달렸다. 교육자 퇴계는 자신의 손자 지도에도 공을 들였다. 그 흔적은 손자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남아 있다.

퇴계에겐 안도(安道, 1541∼1584)라는 맏손자가 있었다. 퇴계는 손자에게 각별했다. 안도가 다섯 살 때는 <천자문>을 써서 깨우치고 이후 경전을 직접 가르쳤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성균관 등 집을 떠나 있는 동안 편지를 썼다. 현재 전하는 편지만 16년간 150통이 넘는다.

퇴계는 편지에서 손자가 벗들과 더불어 공부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칭찬했고, 누구와 더불어 공부하는지 궁금해 했다.

“네가 벗들과 모임을 만들어 공부했다니 참 잘한 일이다.”(1568년 4월 5일)

“너는 겨울 동안 누구와 어느 곳에서 공부할 것이냐?”(1569년 10월 28일)

또 좋은 선비가 있으면 교제하며 배울 것을 권했다. “김근공은 편지를 보니 사람됨을 알 수 있겠구나. 네가 그와 사귀면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1563년 2월 하순)

퇴계는 공부만 강조하지 않았다. 도리에 어긋날 때는 손자를 준엄히 꾸짖었다. 1568년 3월 안도는 서울 처가에서 아들을 얻는다. 문제는 태어난 창양(昌陽)이 모유 부족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이었다. 그래서 안도는 세 살 때까지 모유에 의존하던 창양이 있는 서울 처가로 여종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당시 여종은 아이를 출산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금수저의 흙수저에 대한 횡포 같은 것이었다.

“듣자 하니 젖을 먹일 여종 학덕이가 태어난 지 서너 달 된 자기 아이를 두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더구나. 이는 그 아이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근사록>엔 ‘남의 자식을 죽여 자기 자식을 살리는 건 매우 옳지 않다’고 했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이와 같으니 어쩌면 좋으냐.”(1570년 4월 5일)

퇴계는 여종의 아이가 죽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라도 여종의 서울행을 연기하고, 꼭 데려가야 한다면 여종의 아이까지 함께 보내는 게 마땅하다고 편지에 썼다.

여종은 상경하지 않았다. 그 이후 창양이 죽고 만다.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결단이다.

예의도 가르쳤다. “네 편지를 보니 문장이 끝나는 곳에 ‘∼할 따름입니다’(耳)라는 글자를 자주 쓰더구나. 그러나 어른들께 올리는 편지에는 이 글자를 쓰면 안 되니 그리 알거라.”(1561년 1월 21일)

‘∼할 따름입니다’라는 말은 단정투여서 공손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퇴계는 손자를 비판하는 사람의 말을 낱낱이 그대로 전하면서 신중한 처신을 당부하기도 했다.

“듣자 하니 권호문이 ‘이안도는 사람이 좋기만 한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했다는구나. 그리고 김난상은 ‘이안도가 아무개의 손자라서 견문 있는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했더니, 이제 보니 사리분별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했다는구나. 너는 무엇 때문에 이런 비방을 듣고 있느냐.”(1569년 10월 28일)

이처럼 퇴계는 다른 사람에겐 온화하되 손자에겐 엄격한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의 자세를 견지했다. 물론 인간적인 면모도 있었다. 편지 군데군데 손자 사랑과 신뢰가 드러난다.

“지금 안동부에서 보내온 방목을 보고 네가 입격(入格)했다는 걸 알았다. 비록 요행인 줄은 아나 나도 모르게 나막신 굽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크게 기뻐했다.”(1561년)

손자의 시험 합격 소식을 듣고 엄정한 퇴계조차 기쁜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손자 합격 소식 듣고 퇴계도 기쁨 못 감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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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상 앞에 앉아 있는 손자 뒤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김홍도의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초도호연(初度弧筵)’.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손자는 어떻게 됐을까. 손자는 할아버지의 일을 이었다. 퇴계는 손자의 역량을 인정했다. 퇴계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정리를 손자에게 맡겼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별세하자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고종기(考終記)’를 남겼다. 퇴계의 제자들은 스승의 글을 모으면 손자와 의논했다. 누구보다 퇴계의 뜻을 잘 알고 있어서다. 퇴계의 손자 교육은 이랬다.

조부모가 손주의 버릇을 들이는 건 핵가족이 되기 전까지 우리 사회의 관행이었다. 대가족을 이룬 전통사회에서 육아나 훈육은 생업과 가사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조부모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가족은 아이가 6∼7세 철이 들면 여아는 안채에 남고 남아는 사랑채로 건너간다. 아이는 거기서 조부나 증조부와 함께 지낸다. 잠자리에 들면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시조부터 차례로 조상 이름을 손가락으로 등 허리에 쓰게 한다. 틀리면 할아버지가 손자의 등에 다시 쓴다. 전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는 ‘군자포손불포자(君子抱孫不抱子, 군자라면 손자는 안아도 아들은 안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유가(儒家)에선 전통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았다. <맹자> 이루(離婁)편에는 그 까닭을 ‘세불행야 교자필이정 이정불행 계지이노 계지이노 칙반이의(勢不行也 敎者必以正 以正不行 繼之以怒 繼之以怒 則反以矣), (아버지와 아들은) 세가 통하지 않는 까닭에 올바름을 가르칠 때 통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이로써 서로 해치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아버지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다 보면 기대가 지나쳐 화를 내고 부모 자식 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다.


부자(父子)는 가르치다 자칫 그르칠 수 있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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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부모는 한 세대를 건너뛰는 관계인 만큼 조급한 감정 표출 대신에 느긋하고 절제된 자세로 대하게 된다. 이른바 격대교육(隔代敎育)의 장점이다.

조부모와 떨어져 사는 오늘날도 이런 정신을 지키는 사람은 있다. 경북도의 ‘할매할배’ 의식을 조사했던 김미옥(58) 씨는 “조손 교육의 소중함을 실천하는 할머니도 적지 않게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한 할머니(63)는 6개월째 경북 군위에서 외손녀(4)를 돌보고 있다. 30대 딸은 대구에서 직장을 다닌다. 할머니는 외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돌아오면 동화책을 읽어준다. 또 같이 장난감을 만지며 놀아준다. 이러다 보니 외손녀는 할머니와 친해졌다. 아이가 할머니 말만 들을까 봐 엄마가 오히려 걱정할 정도다. 딸은 훈육도 부탁했다. 딸은 주말이면 간식을 마련해 군위를 찾는다. 김 씨는 “손녀와 지내는 할머니가 그렇게 인자할 수 없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조선시대에는 퇴계의 편지 이외에도 손자를 키우는 할아버지의 일기가 전할 만큼 조손 교육의 전통이 뚜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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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록’. 묵재 이문건이 유배지에서 얻은 손자를 키우면서 16세까지 기록한 양육 일기다. / 사진·이택진

조선 중기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양아록(養兒錄)>을 남겼는데 오늘날로 치면 ‘육아일기’다. 승정원 좌부승지까지 지낸 묵재는 을사사화(士禍)에 연루돼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손자 수봉(守封, 1551∼1594)을 얻는다. 유배 생활이 시작되자 가족은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고 외아들은 수봉이 태어난 지 6년 만에 죽었다. <양아록>은 묵재가 손자의 출생부터 16세까지 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는 중원대 한국학과 이상주(63) 교수가 1996년 세상에 처음 알렸다. 묵재는 유배지에서 삶을 마쳤다. 그 뒤 가족은 묵재의 처가인 충북 괴산군 문광면으로 옮겼다. 이 교수는 묵재의 후손이 살았던 마을의 이웃에서 살았다. 그는 묵재가 퇴계·율곡 등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했다는 말을 들었다. 1989년 한문학을 공부하던 그는 종손을 만나 묵재가 남긴 서책을 보게 된다. 거기서 <양아록>이란 일기를 발견했다. 이 교수는 “손자를 기르며 연령별 특징과 질병의 치료, 그 시대 풍속까지 적은 희귀한 기록”이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라고 평가했다.

묵재의 육아일기를 들여다보자. “십여 세까지 잘 보살펴주어/ 혈기가 거의 안정되고/ 정신과 식견이 성숙하면/ 응당 제 몸가짐 가벼이 하지 않겠지/ 그런 후에 명운이 안정되어/ 재앙·질병·횡액을 면하리라….”


일기에 남은 조선 중기의 조손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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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록’을 남긴 묵재 이문건(맨위)과 손자, 아들이 차례로 묻혀 있는 묘소의 모습. 묵재의 묘는 2012년 경북 성주에서 충북 괴산으로 이장됐다.

‘경기를 일으키니 안타깝다’(1555년 12월)란 제목 아래 붙인 시(詩) 형식의 일기다. 1555년 동짓달 초엿새에는 손톱을 다친 기록도 등장한다. 9월 초 손상을 입었는데 10월 보름께 상처가 아물고 동짓달 초에 손톱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옛날에 증자(曾子)는 수족을 온전히 보존하여/ 오랜 세월 아름다운 자취로 추앙받았으니/ 손자는 모름지기 이런 뜻을 유념해서/ 털끝 하나라도 감히 훼상치 마라….”

일기에는 손자가 이질을 앓고 더위를 먹은 이야기 등 질병과 사고 등이 낱낱이 적혀 있다. 이가 돋아나고 걸음마를 하고 말을 배우는 등 성장발달 사항도 기록했다. 조급증을 경계하고 술 버릇을 탄식하는 등 나쁜 버릇을 걱정하는 내용도 있다.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는 건 내가 악독해서가 아니요/ 아이의 나쁜 습관을 금지시키기 위해서라/ 만약 악습을 금지 시키지 않으면/ 고질이 되어 끝내 금지시키기 어려우리/ 악습의 기미는 초창기에/ 바로 꾸짖고 금해야 하는 법….”

‘종아리를 때리고 나서’(1560년 단오 뒤 1일)란 제목이 붙어 있다. 손자가 화를 내기에 종아리를 때려 깨우친다는 내용이다. 손자 숙길(어렸을 적 이름)은 행동이 거친 편이었다. 수가 틀리면 단칼에 그네를 끊어버리고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음주도 잦았다. 할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악습을 조기에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군데군데 나타난다.

묵재는 일기를 쓴 이유를 스스로 이렇게 적었다. “아이 기르는 일을 기록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다. 노년에 귀양살이하는데 벗할 동료가 적어졌고, 별 계책이 없어 생산에 일을 도모하지 못하는 처지다. 아내는 고향으로 돌아가 외로이 지내는 처지에 오직 손자 재롱을 보면서 날을 보낸다.” 손자 교육은 이렇게 여유 속에서 이뤄졌다.

이후 수봉은 임진왜란 때 격문을 쓰는 등 활동하고 자신의 공에 대한 포상을 사양하는 사람이 됐다고 전해진다. <양아록>은 조손 교육의 생생한 기록이다. <양아록>은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373호로 지정돼 있다. 경상북도와 성주군은 공동으로 최근 <양아록>을 어린이용 만화로 편찬했다. 묵재의 묘소는 2012년 유배지 성주에서 아들과 손자가 묻힌 괴산으로 이장돼 3대가 다시 만났다. 이장 과정에서 많은 유물이 나와 충북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묵재의 후손인 성주이씨 묵재공파 이일섭(80·충북 증평군) 종친회장은 “유물은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고 괴산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며 “앞으로 조손 교육의 전통을 잇는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조손이란 말의 뉘앙스가 달라졌다. 과거엔 정감 어린 단어였지만 지금은 결손 가정을 뜻하는 ‘조손 가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핵가족화로 조손이 따로 사는 경우가 흔해지면서 격대교육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가족 간 정서 교육은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학교도 대신할 수 없는 교육이다.


가족공동체 회복운동 경북도의 ‘할매할배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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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가 지난 3월 26일 문경에서 개최한 ‘할매할배의 날’의 조손 노래자랑대회 모습. 화음을 함께 맞추는 등 준비 과정에서 조손 관계가 돈독해진다.

퇴계와 묵재의 사례에서 보듯 조손 교육은 선비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욕심이 앞서는 부모 자식 간 교육을 뛰어넘어 조손 교육에는 지혜가 숨어 있다. 할머니·할아버지는 혈육의 정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도 어머니·아버지가 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제안해 2014년 10월 지정된 ‘할매할배의 날’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인 ‘할매할배의 날’에 손자·손녀들이 할머니·할아버지를 찾아뵙고 삶의 지혜를 배우는 기회로 삼고 있다. 세대를 건너뛴 조손이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한다. 이를 통해 손자는 인성을 함양하고 궁극적으로는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가족공동체도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경북도는 3월 26일 ‘할매할배의 날’을 맞아 문경에서 랑랑 콘서트를 열었다. 손주와 조부모가 팀을 이뤄 펼치는 노래 자랑이다. 조손이 출연을 위해 서로 만나 연습하면서 조손 관계를 회복한다. 10개 시·군 경로당에는 조부모가 손주 세대의 언어와 사고를 이해하고 카톡·문자메시지 등 소통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시범마을도 운영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조부모와 초·중학생 손자가 함께 하는 밥상머리 체험도 계획하고 있다.

지금의 할머니·할아버지나 7080 베이비붐 세대는 어렸을 때 조부모와의 따뜻한 추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세상 살아가는 이치와 예절, 가문의 전통 등을 가르쳤다. 이제 조손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인 7080이 하나둘 손주를 보기 시작했다. 조손 교육이란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은 할머니·할아버지와 7080세대에게는 의무가 있다. 할머니·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만큼 후대에게 그걸 돌려주는 것 말이다.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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