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울면 난 마음 다쳐” 대사에…중년 여성들, 학생시절 가슴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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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멜로 K-로맨스의 원조 ‘순정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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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 빼어난 그림으로 여성들의 환호를 받았던 한승원의 『프린세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너는 면역체가 형성되지 않은 내 불치의 병.” (이미라 『인어공주를 위하여』)

“내가 다치면 넌 울지만, 네가 울면 난 마음이 다쳐.” (김진 『바람의 나라』)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 딸들』)

기억나시는가. 누군가는 ‘오글오글’ 감성 과잉이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30~50대 여성은 한때 이 글이 적힌 만화책 페이지에 눈물 콧물을 흩뿌리며 다가올 사랑과 운명을 상상하던 소녀였다. 지난 4일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박물관 기획전시실. ‘소녀, 순정을 그리다’ 전시장 한쪽에 적힌 이 글귀들을 발견한 30대 여성 두 명이 동시에 비명을 터뜨린다. “악, 나 중학교 때 저 대사 다이어리에 적어놨는데!”

순정만화(純情漫畵). 소수의 남성 작가와 독자를 제외하면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만화’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큰 눈의 여주인공과 9등신 남주인공이 떠오르는 로맨스 만화.

| 일본은 소녀만화, 한국은 순정만화
60년대 싹터 70년대엔 검열로 침체
“옷 벗은 주인공 사인펜으로 내복 입혀”

1970년대 일본 소녀만화(少女漫畵)에서 영향을 받아 80~90년대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 순정만화는 2000년대 웹툰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등장과 함께 ‘로맨스 웹툰’으로 그 감수성을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등으로 요즘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형 멜로 드라마(K-로맨스)에는 소녀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80~90년대 순정만화의 DNA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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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까지 열리는 한국만화박물관 ‘소녀, 순정을 그리다’ 전시에 참여한 신일숙 작가. 6월 6일에는 김진 작가와 함께 사인회도 연다. [사진 오종택 기자]

한국만화박물관에서 7월 3일까지 계속되는 순정만화 전시는 80년대 『굿바이 미스터블랙』에서 웹툰 『치즈인더트랩』까지 한국형 로맨스 서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무엇보다 3050 순정만화 팬이라면 이름만으로 가슴이 뛸 황미나·신일숙·김진·김혜린·강경옥·한승원·이은혜·이미라 등 순정만화계 ‘어벤저스급’ 작가들이 총출동했다.

‘순정만화’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인다. 초기에는 ‘소녀만화’ 등으로 불렸으나 50년대 유행했던 ‘순정소설’ 등의 영향을 받아 ‘순정만화’라는 표현이 정착됐다. 당시 ‘순정물’은 가난한 소녀가 모진 삶을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내용을 주로 다뤘다.

64년 나온 엄희자의 『행복의 별』은 순정만화의 스타일을 확립한 만화로 꼽힌다. 인물은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배경엔 꽃이 피는 ‘비현실적 장식성’에 여주인공이 멋진 남자를 만나 행복을 완성하는 ‘낭만적 판타지’의 결합이었다. 60년대 한국 순정만화는 재능 있는 작가들의 등장으로 반짝 인기를 끌었지만 70년대 만화 검열이 본격화하면서 침체에 빠진다.

| 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 황금기
‘굿바이 미스터블랙’ ‘별빛속에’ 등
신화와 역사 결합, 서사성 강한 작품

80~90년대는 순정만화의 전성기였다. 70년대 일본 소녀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 『캔디캔디』 등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순정만화팬 층이 형성됐고, 60년대생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며 개성 강한 작품이 쏟아졌다.

김소원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외래교수는 “당시 작품들은 조형적 완성도며 스토리 구성과 연출 등 모든 것이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달랐다”고 설명한다. 대본소(만화방) 만화가 주를 이뤘던 80년대 중반까지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서사성 강한 만화들이 속속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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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 황미나의 『굿바이 미스터블랙』.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최근 이진욱·문채원 주연의 드라마로 재탄생한 황미나의 『굿바이 미스터블랙』(83년)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모티프로 한 영국 귀족의 복수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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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쟁과 파멸의 신’ 에일레스(아레스)를 소녀들의 이상형으로 만든 신일숙의 86년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웅장한 판타지 멜로였다. 강경옥은 『별빛속에』로 SF 순정만화에 도전했다.

4일 전시장에서 만난 신일숙 작가는 “단행본을 연이어 출간하려면, 서사성이 강하고 호흡이 긴 이야기가 필요했다. ‘아르미안’을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 관련 책을 엄청나게 읽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 순정만화의 특징은 주인공의 전신 컷으로 한 면을 가득 채우는 과감한 화면 구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내레이션이다. 사랑 이야기인데도 신체적 접촉은 별로 없다. 순정만화에 유독 엄격했던 검열 때문이다. ‘야한’ 장면은 실루엣만 보여주거나 꽃으로 가렸다.

신 작가는 “전쟁 장면인데도 칼이 나올 수 없고 피도 튀어선 안 된다. 키스 장면이 나오려면 앞의 이야기로 충분히 개연성을 확보해 검열관을 팬으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옷을 벗은 주인공을 그리니 검열관이 사인펜으로 내복을 입혀놓았다는 일화도 있다.

| 잡지 ‘르네상스’ 이어 2000년대엔 웹툰
‘풀하우스’ ‘궁’ 등 줄줄이 드라마화
만화박물관 ‘소녀, 순정을 그리다’ 전시

89년은 순정만화 역사에 획을 긋는 해다. 한국 최초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가 창간됐다. 이후 ‘하이센스’(89년) ‘댕기’(91년) ‘윙크’(93년) 등 순정만화 전문 잡지의 창간이 이어지며 순정만화 팬덤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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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 김진의 『바람의 나라』.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소재의 폭도 확장됐다. 뮤지컬·게임으로도 만들어진 김진의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 설화를 다뤘고, 이미라(인어공주를 위하여)·이은혜(점프트리 A+)·원수연(풀하우스) 등은 현대적인 달달한 로맨스물로 여학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만화평론가 서은영씨는 “‘르네상스’가 나오는 날이면 여학생들이 한정판 브로마이드를 받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점에 몰려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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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 김혜린의 『불의 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외모는 평범하나 밝은 성품의 여주인공이 완벽한 남주인공(『풀하우스』의 라이더)이나 그늘이 있지만 어쩐지 마음 가는 남주인공(『인어공주를 위하여』의 푸르메)과 티격태격 사랑을 이뤄가는 ‘K-로맨스’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박희정·천계영·나예리 등 개성파 작가들의 뒤를 이어 박소희·서문다미 등 로맨스에 강한 신인 만화가들이 출현했다. 이 흐름은 순끼의 『치즈인더트랩』, 석우의 『오렌지 마말레이드』 등 ‘로맨스 웹툰’으로 이어진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는 “90년대 중반 이후 순정만화의 로맨스 서사가 드라마로 적극 유입되기 시작했고, 한류 열풍에 힘입어 웹툰이나 웹소설을 포함한 ‘K-로맨스’가 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가게 됐다”고 분석했다.

‘풀하우스’(2004년) ‘궁’(2006년) ‘탐나는 도다’(2009년) ‘메리는 외박중’(2010년) ‘밤을 걷는 선비’(2015년) ‘치즈인더트랩’(2016년) 등 만화를 원작으로 한 로맨스 드라마도 연이어 성공을 거뒀다. 순정만화 잡지 ‘댕기’ ‘윙크’의 편집장을 지낸 강인선 거북이북스 대표는 “예전의 순정만화가 감성 에세이 같다면 모바일로 보는 로맨스 웹툰은 소재와 호흡이 다채롭다. 하지만 ‘공감’과 ‘소통’을 중시하는 여성만화 특유의 감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S BOX] 대하역사로맨스 ‘북해의 별’ ‘불새의 늪’은 운동권 필독서

1980~90년대 인기를 끈 순정만화 중에는 정치·사회적 코드가 담긴 작품이 많았다. 대표적인 작품이 김혜린 작가의 『북해의 별』과 『테르미도르』. 83년에 나온 『북해의 별』은 가상 국가 보드니아를 배경으로 시민 혁명과 왕정의 몰락, 공화국의 성립을 그린 대하 역사 로맨스다. 88년작인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기 젊은이들의 좌절과 사랑을 그렸다. 황미나 작가 역시 16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격동기의 투쟁과 혁명 속에 피어나는 인간애를 담은 『불새의 늪』(84년)이나 사회 밑바닥 청년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85년) 등을 발표했다.

민주화 운동이 한국사회를 휩쓴 80년대, 이 만화들은 ‘운동권의 필독서’로 불리기도 했다. 『테르미도르』의 애처로운 (그러나 잘생긴) 혁명가 유제니는 많은 여성의 마음을 포섭했다. 김혜린 작가는 지난해 만화평론가 김소원·서은영씨와 한 인터뷰에서 “검열의 시대였지만 가상국이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내용에 큰 간섭은 없었다”고 했다. “80년대 분위기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흔히 생각하듯 운동권적 의식을 갖고 그린 것은 아니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선 오해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운동권에서 쫓겨 나와 만화를 해서 저걸 푸나 보다. 그런 건 아니거든요.”(웃음)

글=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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