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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기업도 정부도 믿어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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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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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정부와 기업은 나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할 의지와 실력이 있는가?’ 오래전부터 문득문득 들었던 의문이 최근엔 부정적 확신으로 자리 잡으려 한다. 최소 146명의 생명을 앗아 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나 미세먼지 오염 문제의 처리 과정을 보면서다.

기업의 탐욕과 정부 무능이 안전 위협
공공선 지향하는 소비로 안전 지켜야

가습기 살균제가 시장에 나온 건 2001년, 원인 불명의 폐질환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건 2006년이다. 이후 비슷한 폐질환 환자와 사망자가 잇따랐다. 하나 이상한 질환에도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의사 홍수종씨가 몇 년간 집념으로 추적해 가습기 살균제가 폐질환 원인임을 찾아낸 후에야 이를 보고받은 질병관리본부가 살균제 사용 자제를 권고했다. 2011년이다.

당시 정부는 옥시 등이 사용한 PHMG/PGH의 유해성은 인정했지만 이마트·애경 등이 사용한 CMIT/MIT 성분에 대해선 폐 손상의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CMIT/MIT 함유 제품만 사용하다 사망한 피해자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미국 환경청(EPA)이 MIT 물질의 유해성(1998년)을 경고했음에도 우리 정부는 92년부터 20년간 유해성 심사를 면제했다고 주장했다. 국민 10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 앞에 정부는 없었다.

‘소리 없는 살인자’ 미세먼지는 온 국민의 고통이다. 한데 정부는 중국발 미세먼지가 주범이라는 ‘중국 책임론’에 슬며시 편승해 ‘마스크를 쓰라’는 대책만 반복했다. 미세먼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내 요인엔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국립환경연구원은 2013년에 국내발 미세먼지의 주 오염원으로 디젤차를 꼽았다. 폴크스바겐 스캔들이 디젤의 환경 오염 문제로 확산된 ‘디젤게이트’로 번지기 전부터 우리 정부는 디젤차의 환경 오염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척했다. 정부 관계자에게 디젤 규제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얼마 전까지도 이렇게 대답했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우리는 최고의 디젤 환경 기준인 유로6를 적용하고 있다.” 국민의 건강은 산업 논리의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다 9일 환경부는 미세먼지 대책으로 자동차 정기검사 시 디젤차의 질소산화물 배출검사를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클린 디젤’의 허구적 신화를 만들었던 유럽이 이미 지난해부터 각종 디젤 규제안을 쏟아내는 와중에 이제야 약한 뒷북 조치 하나를 마련한 거다.

이처럼 기업과 정부가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 최상의 조치를 할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여기에 소비자까지 이기적 소비에 나선다면 우린 숨쉴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소비자 의식 수준은 희망적인가.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옥시 불매운동 이후 판매가 많이 줄었지만 가격 할인 등을 하는 세제와 다른 제품들은 아직 찾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디젤게이트로 유럽에서도 디젤차 판매가 확확 줄지만 한국에선 끄떡없이 늘고 있다. 디젤차 업계가 가격을 낮춰 주는 등의 마케팅 행사가 먹히는 곳도 한국뿐이란다. 여전히 기름 값이 적게 든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소비자에게 최상의 이익이 돌아가는 게 합리적 소비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소비의 개념은 바뀌고 있다. 원래 탐욕은 기업 발전의 원동력의 하나지만 이제 탐욕의 수준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정부의 복지부동은 타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사회에서 공공선을 지키고 자본주의의 양심을 각성시킬 수 있는 주체로 남은 건 소비자다.

최근 떠오르는 ‘소비자시민성(consumer-citizenship)’은 소비자가 일상적 소비 과정에서 이기심을 버리고 공공선을 추구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지식과 태도를 습득해 실천하라고 요구한다. 일각에서 정치행위로 벌이는 소비자운동 정도론 기업의 탐욕과 정부의 무능을 감당할 길이 없어진 거다. 소비자가 무섭게 깨어 있어야 기업도 정부도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흉내라도 내게 될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