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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훈 전 국무총리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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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훈 전 국무총리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인 강영훈 전 국무총리가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강 전 총리는 이날 서울대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유족 측이 밝혔다. 장례 절차는 대한적십자사 김성주 총재와 정원식 전 총재,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으로 진행된다.

군과 외교, 정치, 행정을 두루 거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한 강 전 총리는 5ㆍ16 군사정변에 대항하는 등 숱한 정치적 역경을 겪어왔다.

1921년 평북(북한) 창성에서 태어난 강 전 총리는 영변 농업학교를 나와 만주 건국대학에 진학했지만 재학중 학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8ㆍ15 광복 후인 46년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한 후, 53년 육군 제 2사단 사단장을 비롯해 59년 제 6군단 군단장, 60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쳤다.

이후 1961년 5ㆍ16이 발발하자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이었던 그는 사관생도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돼, 서대문교도소에 100여 일간 수감됐다(육군중장 예편).

강 전 총리는 그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72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USC)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77년 귀국한 이후엔 외교 전문가로 활발히 활동했다. 1978년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외무부에 들어간 이후 80년 주영국 대사 및 주아일랜드 대사, 85년 주로마 바티칸 교황청 대사 등을 지냈다.

강 전 총리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발을 내딛었다. 이어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국무총리 시절 그는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졌다.

특히 1990년 서울에서 최초의 남북 총리회담을 개최해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8년 펴낸 회고록(『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을 통해 1990년 10월18일 평양에서 열렸던 제2차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김 주석이 “강영훈 총리 각하”라 칭하자, 그도 “주석 각하”로 불렀다는 에피소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은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 전 총리를 꼽았다. 정 의원은 “정말 당연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총리가 드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 전 총리는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이후 7년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했다. 또 북한 수재민 돕기(1955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 성수대교 붕괴 사고(1994년), 서울 마포 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시 긴급구호 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 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97년에는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 외교관의 영국이야기』,『소련견제이론』,『한국통일문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등이 있다. 호(號)는 청농(靑農), 종교는 카톨릭(세례명-요한)이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김효수 여사와 장남 강성룡 변호사와 차남 강효영 변호사, 딸 강혜연씨 등 2남1녀가 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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