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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1만 명 즉결처형” 공언한 두테르테 당선 확실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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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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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필리핀당 로드리고 두테르테 후보가 9일 고향인 다바오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투표를 마치고 떠나는 순간 지지자가 그의 볼을 꼬집고 있다. [다바오 AP=뉴시스]

‘필리핀의 트럼프’로 불리는 ‘징벌자(The Punisher)’ 로드리고 두테르테(71) 다바오 시장이 다음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사실상 당선됐다. 선거감시단체 PPCRV와 필리핀방송협회(KBP)는 9일 오후 11시 40분(현지시간) 현재 대선 개표 상황을 비공식 집계한 결과(약 80% 개표) 두테르테 후보가 1348만 9301표를 득표해 2위 마누엘 록사스 내무장관에 550만표 가량 앞섰다고 발표했다. 개표 중반까지 2위를 달리던 무소속 그레이스 포(47ㆍ여) 상원의원은 3위로 쳐졌다. 포 의원은 격차가 벌어지자 패배를 인정하고 두테르테에게 축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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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주니어

부통령 선거에서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58) 상원의원이 1205만표로 1169만표를 얻은 레니 로브레도(52ㆍ여) 하원의원에 36만표 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필리핀 지식층 사이에서 “86년 ‘피플 파워’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마르코스 주니어 역시 ‘강한 리더십’을 주장하며 아버지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략을 써 왔다. 필리핀의 ‘복싱영웅’ 매니 파퀴아오(38)는 12명을 뽑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9위를 기록 중으로 당선이 유력하다. 이번 선거는 81%의 투표율을 기록해 역대 필리핀 선거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67% 개표 결과 2위와 504만 표 차
검사 출신, 재판 없이 1000명 처형
범죄?빈부격차 시달린 국민들 지지
부통령 선거선 마르코스 아들 선두
일부선 “86년 쟁취한 민주주의 위협”

민주필리핀당(PDP-Laban) 후보인 두테르테 시장은 검사 출신으로 22년 간 우범지역인 필리핀 남부 다바오 시장을 지내며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치안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초법적 범죄 응징 때문에 ‘징벌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자경단을 조직해 1000명이 넘는 범죄자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두테르테는 “(재판 없이 죽인 범죄자 수를) 1000명이 아니라 1만 명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해 왔다.

두테르테는 그 동안 초법 살인을 부인해 왔지만 대선 경쟁이 시작된 뒤엔 “직접 총으로 쏴 죽였다” “(죽인 범죄자 수가) 1700명이다”며 대놓고 자랑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는 지난해 두테르테를 사법당국에 고발하기도 했다. 지난해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당시 교통체증을 유발했다며 교황을 “개자식”이라고 불러 논란이 됐다. 인구의 80%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용납하기 힘든 발언이었지만 금세 인기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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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는 지난달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포 상원의원, 집권 자유당(LP) 후보 마누엘 로하스(58) 전 내무장관 등 경쟁 후보들을 두 자릿수 이상 앞서왔다. 여전히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지만 헌법의 중임(重任) 제한규정 때문에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는 베그니노 아키노 현 대통령은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되면 독재정권으로 회귀한다”며 두테르테의 낙선 운동을 주도해 왔다. 포와 로하스의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필리핀은 아키노 대통령 재임기간 연평균 6%대의 높은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필리핀 유권자들이 두테르테에 열광하는 건 높은 범죄율과 빈부 격차 때문이다. 그는 대선 출마 선언에서 “취임 후 6개월 내 모든 범죄를 소탕하고 부패한 공직자와 피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해 기성 정치권에 실망한 시민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유권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필리핀 국민들은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처럼 부정부패와 범죄를 막고 국민들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필리핀 국내총생산(GDP)의 76%를 장악하고 있는 화교 ‘코후앙코’ 가문들의 정치·경제 독점에 유권자들이 환멸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키노 대통령 역시 코후앙코 가문 출신이며 하원의석의 80%, 지방자치단체장 대다수가 이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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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는 “난 아무런 배경도, 후원자도 없다”며 “썩은 정치인과 공무원, 군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공언했다. 국가 경제는 성장일로이지만 인구의 4분의 1이 빈곤층인 필리핀에서 민주주의 가치보다 범죄로부터의 보호나 빈곤 탈출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는 게 NYT의 분석이다.

필리핀 선거감시 태스크포스(TF)는 대선·총선·지방선거가 치러진 9일 투표와 관련된 충돌로 최소 10여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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