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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성식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담뱃갑 경고 그림, 상단이 정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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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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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복지전문기자·논설위원

호주의 담배 억제 정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 갑(25개비)에 2만2000원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개비당 가격으로 치면 한국의 3.9배다. 이도 모자라 2020년까지 3만5000원으로 올린단다. 담뱃갑은 더하다. 갓난아이가 인공호흡을 하거나 발가락이 썩어가는 장면, 구멍 뚫린 목 등의 사진이 상단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후두암·뇌졸중 등을 유발한다는 문구와 함께. 담배 이름은 보일락 말락 하다. 정부가 정한 디자인에 담배 이름만 넣은 표준 담뱃갑(Plain Packaging)이다. 성인 남성 흡연율(13%)이 한국(43%)보다 훨씬 낮은데 정책은 엄청 독하다.

유럽연합(EU)도 20일 상단에 경고 그림(담뱃갑의 65%)을 넣는다. 미국 일부 주는 흡연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올리려고 한다. 세계가 담배와의 전쟁에 한창이다.

한국은 14년 만에 올 12월 경고 그림을 도입한다. 그런데 지난달 22일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가 제동을 걸었다. 담뱃갑 상단에 넣으면 소매점들이 가리개를 설치할 것이고 여기에 1000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이유에서다. 규개위 일부 위원은 “편의점 등에서 경고 그림이 일반인에게 상시 노출되면 정서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노약자·임산부·판매종업원에게 심한 혐오감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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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리개를 설치할지 모르지만 그리해도 담배회사가 공급할 가능성이 커 소매점 부담이 없을 것이다. 일반인에게 경고그림을 노출해 흡연을 줄이거나 시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게 목적인데 정서적으로 좋지 않다고 하니 이해가 안 간다. 규개위의 주장은 14년간 충분히 논의해서 문제 없다고 결론 낸 것이다. 게다가 경고 그림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투의 지적은 월권이다. 규개위에 보건전문가가 있으면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KT&G 사외이사를 지낸 규개위원을 기피신청하지 않은 정부의 안일함도 문제다.

경고 그림은 2001년 캐나다를 시작으로 80개국이 도입했는데, 어디에서도 가리개 비용이나 판매원 스트레스 등의 희한한 지적이 나오지 않았다. 국민 건강을 위해선 담배 규제가 불가피하다. 그래서 192개 유엔 회원국이 2003년 만장일치로 최초의 보건 국제협약인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을 채택했다. 여기에 경고 그림 위치는 상단으로 돼 있다. 이왕 시행할 바엔 눈에 잘 띄어야 효과가 좋다. 규개위가 아무쪼록 13일 회의에서 담뱃값 2000원 인상을 통과시킨 정신을 되살리길 바란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