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전모 국방부 국회보고내용

중앙일보

입력 1985.06.07 00:00

지면보기

종합 03면

80년 계엄사가 발표한 내용과 그 당시 수집한 자료 등을 기초로 해 광주사태에 대한 배경과 동기를 말씀드리겠다.
10·26 사태이후 80년 당시 정부는 사면·복권을 약속하고 개헌일정을 단축하는등 민주화일정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일부 정치세력의 성급한 주장과 학생사주로 인하여 학원소요가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치안유지가 곤란한 가운데 경제적으로 노사분규가 가열화되어 많은 업체가 농성내지 파업에 가담하였으며 특히 사북사태등으로 인하여 생산과 수출이 급격히 둔화되어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물가가 치솟아 민생 안정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되었다.
또한 호시탐탐 남침기회포착에 혈안이 된 북괴는 혼란한 국내정세에 고무되어 대규모 기갑부대를 전방으로 추진배치하고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무력부상황실에 나와 사태추이를 주시하고 또한 인민군 총참모장 오극렬은 최전방인 개성에 나와있는등 군사적 긴장상태를 고조시키고 있어 국내외적으로 국가안보와 국민생존권이 크게 위협되는 위태로운 상황에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란사태·아프가니스탄사태·중동분규로 인해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북괴가 곧 남침을 강행할 것이라는 첩보로 인해 건국이래 최대의 난국을 맞게됨으로써 당시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대다수국민들이 사회의 안정질서회복을 갈망하는 상황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부득이 국가적 비상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 5·17비상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조치로 서울등 대부분의 지역이 일단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에서만은 전국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인 80년5월18일 상오 9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부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을 방은 전남대생 2백여명이 사전에 계획된 시위를 강행하기위해 가방속에 돌을 넣고 도서관출입을 요구하다가 계엄군이 이를 저지하자 준비한 돌멩이로 일제히 투석전을 전개, 파상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질서유지를 위해 출동한 계엄군이 학생으로부터 돌을 맞는 사태가 발생하고 그후 학생들은 시내로 잠입하여 가두시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경찰력으로 질서회복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시위군중들에 의해 경찰 27명이 중경상을 입는등 경찰력만으로는 더이상 사태를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되어 부득이 군이 질서유지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저지과정에서 일어난 흥분된 시위군중과 계엄군과의 충돌과 오해로 감정이 폭발되었고 불순분자에 의해 조작된 기상천외한 온갖 유언비어는 지역감정을 자극·선동하여 군과 시민을 이간시키고 방화·파괴및 살상을 유도, 끝내는 총기를 탈취한 무장난동으로 광주시 일원은 무법 천지화되고 모든 행정기능이 마비되어 드디어 무정부상태에 이르게되었다.
이같이 광주사태가 확산되게된 이면에는 일부 정치세력에 의한 배후조종이 있었던 점은 이미 당시의 대법원판결을 통해 분명히 밝혀진바 있다.

<사태 경위>
다음은 날짜별 사태진전상황에 관해 말씀드리겠다.
5월18일 상오9시쯤 전남대 앞에서 최초로 계엄군과 충돌했던 전남대생 2백여명이 상오10시쯤 광주시내 중심가로 진출하여 계엄철폐등의 구호를 외치며 점차 격렬화되었고 하오 2시쯤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파출소투석·경찰차 방화등 시위가 격렬해짐으로써 경찰력만으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계엄당국은 부득이 하오4시40분쯤 광주지역주둔범력의 일부로써 폭력저항을 조기 수습하러 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투석과 폭행으로 대항하였고 일부 불순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 유언비어에 흥분한 주변건물의 일부시민이 합세하여 군인에게 투석함으로써 쌍방간에 희생자가 발생하자 상호 감정이 폭발하여 욕설과 고함으로 대결하게 되었으며 젊은 군인들이 격렬한 난동의 와중에서 저지임무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자연히 시위학생을 군중의 면전에서 저지·연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학생들의 저항으로 인하여 다소 과격한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는 상호간에 부상자는 발생하였으나 단 한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일 정오부터 『경상도군인이 전나도사람의 씨를 말리러왔다』 『경상도군인만 골라서 왔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내었다』는 등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이는 우리 내부의 분열과 혼란을 극대화시켜 폭동으로 유도하려는 불순분자들의 계획적인 소행이었다.
이때 출동한 병력은 광주지역에 위치한 일부병력과 전주지역에 위치한 7공수단예하의 33대대및 35대대였으며 35대대의 대대장은 전주출신이고 35대대 대대장은 대구출신이었으며 광주에 투입된 부 대원의 40%가 전남북출신으로 이런 사실을 보아서도 그 유언비어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 말인가를 잘 실증해주고 있다.
19일에도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는 시내에 퍼져 이성과 냉정을 상실한 군중심리가 광주시내를 휩쓸게 되었고 흥분한 일부군중들이 격렬한 시위를 감행하면서 화염병으로 파출소를 방화하는가 하면 취재차량과 승용차등을 방화·파괴하였으며 이러한 와중에서 최초로 계엄군의 무기가 군중에게 탈취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공수부대들이 젊은 놈은 모조리 죽인다더라』 『광주시민 70%를 죽인다더라』등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악랄한 유언비어가 시시각각으로 조작돼 유인물과 구두을 통해 조직적으로 유포됐다.
이리하여 시가지는 연기와 함성등으로 대혼란이 야기됐고 군중들이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경찰과 계엄군에 맞서 난동을 부림으로써 그와중에 최초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일 상오에는 비가 내려 별다른 상황이 없었으나 하오에 이르러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흥분한 군중 1만여명이 극렬한 시의를 전개했으며 특히 하오4시30분쯤에는 무등경기장앞 광장에서 악랄한 유언비어에 흥분한 택시운전사들이 모여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택시40대를 앞세우고 차량시위를 감행한데 이어 하오6시30분에도 택시 2백여대가 동광장에서 3열로 전조등을 켠채 시위를 강행하는 한편 MBC방송국을 방화했으며 시청을 파괴하고 도청 앞의 저지경찰관 4명을 차량으로 깔아죽이는등 시내의 수개 파출소를 부수고 버스와 택시대열을 앞세워 군경저지선을 돌진, 돌파를 시도했다.
광주시는 연기와 불꽃이 치솟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게 됐고 시위에 참가한 군중은 약10만명에 달했다.
차량에 마이크를 달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조직적으로 전개된 난동에 의해 이들의 시위는 야간에도 횃불시위로 계속됐다.
밤11시쯤에는 MBC방송국이 전소되고 11시45분쯤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 2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21일 상오2시에는 군중들이 광주세무서를 습격, 방화하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17정을 탈취하기에 이르렀으며 새벽6시쯤에는 광주역과 KBS, 월산동사무소를 방화하고 시내에서 차량을 닥치는 대로 탈취, 파괴한후 상오9시쯤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습격, 군에 납품할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차량과 민수용 차량 2백여대를 탈취, 화순·나주·담양·장성등 주변 소도시로 진출, 경찰및 예비군의 무기를 탈취, 난동을 부리면서 시위를 계속했으며 특히 난동자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채 화순광업소와 광주소재 한국화약보급소를 습격하여 다량의 폭약및 TNT와 35만여 개의 뇌관등을 탈취했다.
21일 하오 1시쯤부터 난동자들은 탈취한 기관총을 고층건물 옥상에 설치하고 전남도 도청 내의 계엄군에 무차별사격을 가했다.
간첩및 좌익수 등이 수감돼있는 광주교도소를 이날만도 3차례에 걸쳐 장갑차를 앞세워 습격, 계엄군과 교전을 전개함으로써 사상자를 내게 하는 난동을 계속 전개했으며 이날의 총격·난동과정에서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또 난동군중들은 시민의 봉기를 선동하는 가두방송외에도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지하신문(5월18일부터 26일까지 9호를 발행)을 발행하여 계엄군의 섬멸을 선동했다.
낮12시쯤에는 민간점포인 금성센터에 난입하여 각종 전자제품을 방화·파괴하고 주유소를 습격하여 휘발유등을 탈취하는 등 점차 그들의 방화·파괴및 탈취행위가 민간업체로까지 확대되는 한편 나주시의 금성파출소 무기고를 습격, 카빈 5백10정을 비롯한 각종무기 7백70여정과 약11만발의 탄약등을 탈취, 난동집단은 점점·대규모의 무장저항집단으로 화해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날 있었던 신현교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각료의 사임을『우리의 항쟁으로 신총리이하 전각료가 굴복 퇴진했다』 『최대통령은 하야하게 됐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난동자들을 고무하고 시민들을 현혹해 그들의 계엄군에 대한대항을 더욱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군은 무장 난동자들과의 충돌로 무고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불행한 결과를 회피키위해 21일 하오6시쯤에 계엄군을 외곽지대로 철수시켰으며 철수과정에서 계엄군은 무장집단으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다.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시내와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 봉쇄하는 한편 여타 지역에서의 난동을 진압하면서 선무활동에만 주력했으나 이날밤 남평쪽에서 버스를 타고 온 난동자들이 외곽봉쇄부대를 습격하는등 계속 총기에 의한 격렬한 저항을 시도했다.
22일 광주시는 무장난동자들이 완전히 지배하는 치안부재의 무정부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무장집단들의 난동은 영광·함평·완도·목포·송정읍·해남등 전남일대로 계속 확산됐다.
상오 9시35분쯤 또다시 차량에 기관총을 장치해 광주교도소를 습격, 계엄군과 총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난동자들은 계엄군의 재진입에 대비, 진지를 구축하고 이른바 「시민군을 조직 ,편성하는등 이른바 시민의 호응과 합세를 유도하며 장기전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면서 시체를 진열하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한다는 구실아래 시민을 동원, 계엄군에 대항하며 끝까지 싸울것을 선동했다.
한편으로는 평소 원한관계에 있는 민가에 침입하여 가족을 몰살시키거나 금품을 강탈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건도 발생했으며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이 차츰 그들의 만행에 위협을 느끼고 이성과 냉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23일에 이르러 극에 달했던 난동자들의 방화·파괴·살인·약탈행위 등의 난동은 정부 및 계엄당국의 설득과 선무활동의 효과와 난동자들의 무차별적 만행, 잔학행위에 혐오감, 위기의식을 느낀 시민및 학생들은 이성회복과 자성에 의해 수그러지기 시작했으며 여전히 주변지방에서의 습격과 무기탈취및 약탈행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광주시내에서는 무장난동자 시체 59구의 전시와 가구별 방문에의한 장례비 강제징수, 광주공원의 계엄군에 대행하기 위한 보급기지화 작업, 시내요소에 바리케이드 설치, 진지구축등 반항적인 행동을 계속하다가 하오7시쯤 무장군인중 7명이 군부대에 투항한 것을 비롯해서 광주사태수습위원회가 계엄분소를 방문해 무기를 반납하는등 계엄당국과의 대화를 통한 수습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할것을 주장하는 강경한 세력들과의 의견충돌로 전반적인 수습에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특히 이들 난동자들은 광주에서의 봉기에 호응하여 전국각지에서도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7함대가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시내에 퍼뜨리며 계속 저항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24일 난동자들은 다시 저항자세를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낮12시30분 쫌에는 도청앞에서 위령제를 거행한다는 구실하에 1만5천여 명이 집결해 「시민궐기대회」를 여는 가운데 특정인의 화형식을 가졌으며 시가 외곽에서는 난동집단들이 이동하는 계엄부대에 총기를 난사하는등 사태가 조기에 수습될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25일에도 수습위활동이 강·온 양파로 갈린채 각각 별도의 행동을 보여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강경파들이 시민 5만명을 모아 궐기대회를 열고 「계엄철폐」등을 요구하는 결의를 했고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의 호응도가 더욱 줄어들자 난동자들이 『계엄군은 못 들어 온다. 5일간만 견디면 된다』고 선동하면서 『대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민들은 우리 시민군에 가담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자』고 선동했다.
특히 계엄군이 진입하기 전날인 26일에는 계엄군이 일부 차단에서 점차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가자 무장 난동자들을 신속하게 기동배치하는 조직적 지휘와 기동성까지 발휘했으며 계엄군이 약속을 위반, 무력진주하려 하니 시민들은 궐기, 대항하자고 선동을 계속해 이날 하오 3시쯤 5천여 명을 모아 다시 궐기대회와 시위행진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9일간의 광주사태경위를 살펴보면 일부 전남대생들의 계엄군에 대한 투석을 시발로 한 격렬한 시내 시위와 이에 대한 계엄군의 대응과정에서 발생한 충돌로 발단되었으나 외부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은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조종과 유언비어의 유포를 통한 교묘한 선동을 통해 광주시민의 지역감정을 촉발, 흥분시킴으로써 사태가 극도로 악화됐던 것이다.

<무력진압의 경위>
광주사태가 무장 난동자들에 의해 무정부상태에서도 군은 끝까지 무익한 작업과 시민의 피해를 염려해 최소한의 자위권발동마저도 자제했으며 비록 군인이 난동자에게 잡혀 무참히 학살되는 상황에서도 사태악화방지에 주력했다.
또 계엄군이 시내에 머물러 난동자들과 대치하는 것이 시민들에게 더 큰 자극을 줄것을 우려해 5월21일에는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 봉쇄에 만전을 기하면서 시민자제의 수습노력을 지켜보는 최대한의 인내를 감수했다.
5월 22일 박충동 국무총리서리가 취임첫날 현지에 도착, 시민에게 자제와 진정을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5월25일 최규하대통령도 현지에 도착해 간곡하고도 절실하게 자제와 질서회복을 호소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계엄사령관도 무기·탄약·폭발물 소지자는 폭도로 오인되니 무기와 폭발물의 소지금지와 해산을 종용하는 경고문·전단 42만부를 살포하고 항공기와 차량방송을 통해 계속적인 선무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더욱이 시민군을 자처하는 난동자들은 외곽·야산지대에 진지구축과 주요도로변에 탈취한 기관총을 배치하고 각종 장애물을 구축, 장기게릴라전을 획책하고 도청거점내에서는 막대한 TNT폭약을 장전, 자포대세를 갖추는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양민을 협박하여 장기전을 획책했다.
무정부 상태가 지속됨에따라 광주시의 서민층은 생필품및 의약품의 고갈로 극도의 생활고를 겪게됨에 따라 집단 범죄의 발생이 우려되었으며 시민 자치능력에 의한 자체수습및 치안회복의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치안 공백 상태의 장기화로 불순분자 또는 북괴무장공비의 침투가능성이 증대되었다.
난동 6일째부터는 선량한 시민의 흥분기세가 점차 진정됨으로써 무장난동자와 일반시민의 분리가 확인되어 최소한의 희생으로 진압작전을 실시할 여건이 조성되었고 무정부상태하의 민생고를 조기에 해소키 위해 5월27일 새벽1시를 기해 작전을 실시했다.

<진압작전 지침>
진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당시의 광주시 상황은 정규시가전과 유사한 작전을 실시해야만하는 상황이었으나 선량한 시민과 난동자를 분리시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최소한의 피해로 작전을 단기간에 종결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지침하에 작전을 실시했다.
즉 쌍방희생의 최소화, 정확한 첩보, 특정목표 확보와 연결작전 동시실시, 기습달성등의 계획지침을 기초로 해 외곽통로를 차단한 후 봉쇄선을 형성하고 특정목표에 침투하여 진압하도록 계획했고 계속적인 무기회수 및 선무작전을 실시했다.
또 피해를 최소화하고 성공적인 사태수습을 위해 광주일원에 대한 항공사진 촬영과 작전개시전에 첩보수집요원을 침투시켜 난동자들의 배치장소, 인원수, 무기, 경계상대등을 사전 파악했고 도청 지하실에 집결시켜놓은 폭발물의 폭파방지를 위해 특수기술요원이 도청 지하실에 진입, 선량한 학생들의 협조하에 폭발물의 뇌관과 신관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광주시가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기습달성을 위해 광주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전화선을 단절했고 작전회의에서도 작전일정을 무기연기라고 발표하면서까지 작전실시주요 지휘관에게만 작전시간을 통고했다
작전개시시간도 상오1시를 택함으로써 선량한 시민은 자가에서 취침하고 극렬 난동자만 남아있는 시간을 택하였으며 작전팀은 3∼4명이 1개조가 되어 은밀히 거점에 기습함으로써 시민의 피해가 없도록 작전을 실시했다.
작전개시 후 난동자들이 대비태세를 갖추고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함에 따라 무장상태로 최후까지 저항하는 17명을 부득이 희생시키고 작전을 종결할 수밖에 없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아울러 사전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피해·관련자 조치>
이 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1백91명이었으며 이를 신분별로 보면 민간인 1백64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었다. 부상자는 중상 1백21명, 경상 7백30명이었으나 부상자의 대부분은 간단한 치료후 생업에 복귀하였다..
민간사망자에 대한 위로금은 장례비·조의금및 유가족 생계보조금을 지급하였고 부상자들에게는 치료비 전액을 부담하였으며 중상자에게는 등급에 따라 위로금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재산피해는 건물2백50동, 차량 8백82대, 시설물 8백84개소, 유류 3천여드럼, 기타장비 1천9백25점이 파괴및 소실됨으로써 피해액은 약 2백60여억원 상당이었고 민간재산피해에 대해서는 파괴된 주택및 시설은 완전복구하고 각종 장비및 물자피해는 정당한 보상조치를 하였다.
또 난동자들에 의해 피탈된 무기는 군용이 5천8점, 민수용엽총이 3백5점이고 탄약은 소화기탄 28만8천8백60발을 비롯해 수류탄 5백62발, 폭약 3천여상자였으며 군용피탈 무기의 약98%에 해당하는 4천9백26정이 회수되었다.
광주사태에 관련하여 검거된 자는 총2천5백22명이었으며 이중 1천9백6명은 훈방하고 6백16명은 군법회의 검찰부에 회부되어 그중 2백12명은 불기소되고 4백4명은 기소되어 사안에 따라 형이 선고되었으나 그후 특별사면 등의 조치로 전원 석방되어 현재 복역중인자는 한사람도없다.

<결론>
지금까지 광주사태에 대한 전모를 보고드렸다. 여러 의원께서도 잘 이해하셨으리라 사료되지만 보고 드린 내용은 사실 그대로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린다.
특히 항간에 유포되고있는 사망자에 관한 유언비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사실 무근함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광주사태가 수습된 후 10일 간에 걸쳐 신고소를 설치하여 신고를 접수했으나 민간인사망자 1백64명 이외에 더 신고된 사실이 없었고 둘째, 의사·변호사·검사·군검찰관·민간대표로 구성한 검안위 49명에 의해서 확인된 숫자이며 셋째, 광주시청에서 사망자 1명당 위로금을 1천4백30만원씩 지급하였으나 더 이상의 신고자가 없었으며 넷째, 사건발생 후 현재까지 5년이 경과했으나 유족·친지·인권단체 등으로부터 추가적인 신고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사망숫자는 사실임이 입증되고있다.
광주사태시 사망자가 2천여명이나 된다는 유언비어는 사태직후 사망 및 행방 불명자로 신고된 인원이 2천여명으로서 이중에는 사망자·체포구금된자·부상으로 입원된자·피신자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바 이러한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것으로 사료되며 민간인사망자 1백64명이외에 더 있다면 언제든지 정부나 국회, 각 정당, 각 언론기관, 종교단체, 사회 및 인권단체 등 어디라도 신고를 요망하는 바이다.
광주사태는 그 자체가 국가적 위기였으며, 이 위기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데 군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광주사태와 관련해군의 명예와 사기를 더 이상 저하시키는 일이 없도록 의원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