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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값인 육두구·정향 본산지, 향료 무역상의 ‘블루오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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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15면

1 육두구·정향 같은 향료의 본산지이자 집산지인 인도네시아에는 한때 향료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한 네덜란드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사진은 스파이스 루트의 핵심 거점이었던 술라웨시섬의 마카사르에 있는 포트 로테르담. 네덜란드의 국제적 항구도시 로테르담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2 정향을 말리는 모습. 3 『동의보감』에도 소개된 육두구. 4 향료 집산지인 마카사르의 20세기 초반 풍경. [사진 주강현]

술라웨시니, 마카사르니, 말루쿠니, 암본이니 하는 지명은 우리에겐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도서나 도시들인데 낯이 익지 않다. 하지만 해양 실크로드 문명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육두구(肉荳·nutmeg)나 정향(丁香·clever) 같은 향료의 주산지거나 집산지로서 동서양 무역의 핵심 거점들이었기 때문이다.


향료에는 당연히 후추·박하·계피·강황·생강 등도 포함되겠지만 이번에 탐사대가 찾아간 말루쿠 제도는 육두구와 정향의 ‘메카’였다. 암본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놀라운 풍경을 목도한다. 작은 섬이 분명한데 암본 도심은 엄청나게 크다. 향료가 만들어낸 자본 축적이 그대로 반영됐을 터다. 듣던 대로 암본섬엔 집집마다 이들 향료를 우리가 고추 말리듯이 말리고 있다. 마당은 물론이고 도로변, 무슬림사원 등 햇볕 잘 드는 공간만 있으면 정향과 육두구 말리기다.


암본섬 북부의 히투라마 선착장에서는 세렘섬으로 가는 배가 수시로 뜬다. 암본과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섬인 세렘 역시 정향의 본산이다. 역사적으로는 몰루카 북부의 거대한 섬 할마헤라에 속한 테르나테, 티도레도 정향으로 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 무엇보다 암본 남쪽의 반다 제도는 육두구의 본향이다. 자그마한 바위섬으로 이어지는 그곳이야말로 유럽 열강 자본가들의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다.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육두구의 본향 육두구 같은 향료는 한반도에도 어김없이 상륙해 『동의보감』에 뚜렷하게 그 족적을 남겼다. 적도의 바다에서 펼쳐진 향료의 바닷길이 한반도까지 이어진 결과다. 오늘날 홍콩이 ‘향항(香港)’인 것은 영국이 오만 가지 향료를 홍콩으로 집결시켜 유럽에 판매한 데서 비롯되었다. 탐식하듯 향을 찾아나섰던 서구사회는 향료를 중심으로 글로벌적 자본 운동을 추동시키며 세계무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물론 그 무역의 성격이 호혜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적 착취였지만 말이다. 인공향료의 시대가 닥쳐오고 전통적 향료의 시대는 마감했다. 그러나 좋은 향을 탐하는 인류의 욕망은 영원히 ‘현재진행 중’이다.


서양인이 오매불망 원했던 향료. 시장이나 박물관 등에서 자주 보았지만 막상 이 낯선 곳에서 향료를 직접 눈으로 보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 이 향료를 찾아 수많은 탐험가와 무역상인들이 미지의 동쪽 바다로 몰려들었지!


페스트 등 역질이 나돌 때마다 향료는 그 신비로움이 부풀려져 만병통치약으로 신비화했으며 금값에 거래되었다. 실크로드의 종착점인 베네치아나 이스탄불에 가면 어김없이 향료가게가 있고 먼 동방에서 실려온 향료들이 전 유럽으로 유통되었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유럽인은 알 길이 없었다. 머나먼 동쪽에서 온다는 신화가 유럽에 널리 퍼졌고, 황금을 가져오는 향료를 찾아 동쪽으로 배를 몰게 했다. 베네치아의 독점시대를 거쳐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차례로 이곳 동방의 ‘향료의 성지’를 차지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최고관리자 얀 피터스존 쿤은 “전쟁 없이는 무역 없고, 무역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끊임없는 식민전쟁을 계획하고 실천했다. 다른 나라가 ‘블루오션’인 향료무역에 손대는 것을 참지 못했고, 오로지 ‘독점’을 위해 움직였다. 문명의 그늘이 짙게 적도의 바다에 드리웠고, 오늘날까지 실재하는 인도네시아의 포트 로테르담(Fort Rotterdam)이나 포트 암스테르담(Fort Amsterdam) 성채에 상징적으로 각인돼 있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항구도시 이름이 들어간 포트 암스테르담은 암본섬 북부에, 포트 로테르담은 술라웨시섬 마카사르에 있다.


포트 로테르담은 물류창고 백화점 방불 마카사르에 당도하니 나도 모르게 진한 향료에 취해 버린 듯했다. 마카사르는 동인도네시아의 관문이다. 오랫동안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던 네덜란드는 이곳에서 동서물류를 관장했다. 중간지대에 집산처를 만들어 유럽으로 향료를 실어 날랐던 전략적 거점이었다. 옛 사진을 보면 포트 로테르담 주변에 향료가 수북하게 장마당을 채운 모습이 나온다. 현재의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나면 포트 마카사르가 있고, 그 옆에 포트 로테르담이 위치한다. 오늘날의 ‘서유럽 항구 1번지’ 로테르담이 1667년 일찍이 마카사르에 자리 잡은 것이다.


본디 원주민 항구였던 파오테레 선착장을 찾아가보니 좁은 수로에 전통 선박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수로 옆의 좁은 골목에 과일·설탕가게와 기름판매상 등 작은 상점들이 도열해 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골목이지만 유럽 국가들 이전에 아랍 상인들이 드나들던 오랜 역사를 안고 있다. 인근 포구로 떠나는 전통적 거점으로 지금도 활용된다. 네덜란드는 이들 전통 포구에서 조금 남쪽에 자신들의 포트 로테르담 항구를 개설했다.


포트 로테르담은 거대한 물류창고들의 백화점을 방불케 했다. 지금 봐서도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수백 년 전 기준으로 본다면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술라웨시 전역에서 집산된 향료가 모여들었고 나중에는 커피나 설탕 같은 단작 플랜테이션 산물이 집결했다. 제국의 착취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자신들의 항구 이름을 동인도까지 이동시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글로벌 경영네트워크가 확인된다.


그중의 창고 하나는 박물관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술라웨시를 지배하던 술탄의 역사다. 식민지시대 창고에 자신들의 왕의 계보를 그려놓은 모습을 보며, 덕수궁 석조전에서 서양식 복장을 하고 사진 찍힌 고종 황제의 초상을 떠올렸다.


마카사르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가 봤다. 좁은 골목에 시계점·금은방·포목점·선물가게·잡화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화교들은 적어도 100년 이전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어떤 커피상점은 1901년부터 커피를 만들어 팔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었다. 중국이 지금 펼치는 일대일로 신해양실크로드의 전략적 촉수가 조만간 이 차이나타운까지 미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련을 겪으면서 원주민 사회에 단련돼 토착화된 이들이 일정한 역할을 해낼 것이 분명하다. 과거의 네덜란드 제국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차이나제국’의 행보가 겹쳐진다.


이슬람·가톨릭·개신교 종교문명의 교차로 스파이스 루트, 즉 ‘향료의 길’ 본향인 말루쿠 암본은 이슬람·가톨릭·개신교 등 여러 종교의 문명들이 뒤얽힌 교차로이기도 하다. 암본은 비교적 큰 북부와 작은 남부로 이어지는데 북부는 대체로 이슬람권, 남부는 기독교권역이다. 암본에 머무르는 내내 종교전쟁이 임박한 듯한 절박함이 느껴졌다. 시내에서 남쪽 에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도로표지판처럼 십자가가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네덜란드가 이슬람 세력이 약한 암본 남부를 식민거점으로 만들고, 대대적으로 개신교를 뿌리내리게 한 결과다.


개신교 말고도 암본은 가톨릭 역사에서도 중요하다. 포르투갈이 암본에 처음 정착한 것은 1521년. 동방에 가톨릭을 처음 퍼뜨린 프란체스코 사비에르 신부는 암본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 후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에 당도한 사비에르가 급속도로 ‘기리스단(吉利支丹·크리스천의 옛 일본어)’을 늘려나간 것은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 암본 시내의 사비에르 헌정성당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포르투갈은 1605년 신흥 네덜란드에 의해 축출된다. 자유를 향한 네덜란드 신교도의 열망과 자본의 힘이 그들을 해양제국으로 내몰았다. 로드 엠브레흐츠 주한 네덜란드대사는 이러한 네덜란드의 해양적 진취성을 “물과 바다는 네덜란드에 도전이자 기회였다”(디 오션지 4호)고 정리했다.


사족이 하나 필요할 것 같다. 중국인들도 끊임없이 향료를 찾아서 왔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우리 밥상에 올랐던 후추도 이들 중국 상인을 통해 수입되었고, 나중에는 일본 상인들이 쓰시마를 통해 부산으로 들여왔다. 『동의보감』에 올라 있는 육두구도 그런 경로로 들어왔을 것이다.


마카사르에서 만난 화교촌의 중국 푸젠성 출신 탕중 반 커피점 주인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곳 술라웨시에서 커피와 향료를 5대에 걸쳐 150여 년 팔아왔어요.” 케네스 포메란츠가 자신의 저서 『무역을 창조한 세계』(런던, 2006)에서 언급했듯이 ‘푸지안 무역 디아스포라’(푸젠성 사람들의 대대적인 세계 화교 진출)는 동방무역로를 창출해나가는 근거였다.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오늘의 실크로드 대탐사 흔적에는 주로 유럽인이 남긴 궤적이 돋보이지만 실상 이 바닷길을 개척한 이들은 유럽인 이전에 아랍상인이었다는 점이다. 아랍인의 궤적은 이슬람이란 종교로만 우리에게 다가올 뿐이다. 향료는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슬람 무역상인들 역시 가장 중시하던 품목이다. 그들 손을 거쳐 향료가 베네치아·이스탄불·알렉산드리아 등으로 흘러들어갔고, 거기서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그들 아랍상인의 본격 무대인 인도양으로 떠날 순서다.


다음에는 2회에 걸쳐 스리랑카 향료의 길과 불교의 바닷길편이 소개됩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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